한시간에 끝내는 러시아사 이야기1

  • 등록 2025.05.25 18: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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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막
시베리아의 설원에서, 인류사의 한복판까지
러시아를 이해하려면, 지도를 거꾸로 봐야 한다.
흔히들 유럽의 끝자락에 붙은 커다란 나라로 보지만, 실제로는 유럽이 러시아의 한 모서리에 끼워져 있는 것이다. 남한의 170배가 넘는 면적, 인간이 살기 힘든 혹한과 침묵의 땅. 이곳에서 제국은 태어났다. 흥미로운 건, 이 제국은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살아왔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역사는 곧 정체성의 역사다. 그들은 한 번도 '러시아인답게'만 살아보지 못했다. 처음엔 바이킹이었고, 그다음은 몽골의 속국이었다. 정교회를 받아들이면서는 비잔틴의 후계자라는 환상을 가졌고,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이자 유럽인과 경쟁하려 했다. 스탈린 시대에는 '공산주의 인류'로 자신을 정의했으며, 오늘날 푸틴의 러시아는 또다시 제국의 망령을 꺼내들고 있다. 러시아는 마치 끊임없이 다른 옷을 갈아입는 배우 같다. 무대는 바뀌지 않는데, 주인공의 분장은 늘 달라진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다.
“왜 러시아는 늘 제국이 되려 했는가?”
“왜 러시아인들은 권력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숭배했는가?”
그리고, “그들에게 국가는 어디까지가 보호자이고 어디까지가 감시자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리는 단지 연대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인의 마음을 따라가야 한다. 얼어붙은 농노의 들판을 지나, 이반 뇌제의 궁정으로 들어가고, 피터 대제의 해군 기지에서 서풍을 맞으며, 붉은 광장의 군중 속에서 스탈린의 연설을 들어봐야 한다.
역사는 지리적 사건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 두려움, 그리고 자기 착각의 축적이다. 러시아라는 나라에선, 이 세 가지가 특별히 진하게 배어 있다.

 

놀랍게도, 러시아는 늘 ‘한 번도 세계 최강국이었던 적은 없지만’, 모두가 그 이름을 기억하는 나라였다. 군사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의 문화, 음악, 문학, 그리고 무엇보다도 ‘버티는 힘’이 사람들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차르가 죽고, 혁명이 일어나고, 체제가 무너져도 러시아는 사라지지 않았다. 때로는 권위주의의 아이콘으로, 때로는 저항의 상징으로, 그리고 때로는 그저 막연한 두려움으로 존재했다.

 

여기서는 그런 러시아의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대단한 영웅이나 사악한 독재자만의 기록이 아니다.
한 문명과, 그 문명이 만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벌어진 내면의 투쟁에 관한 이야기다.
때로는 찬란했고, 대부분은 잔혹했으며, 무엇보다도 진실했다.

 

러시아를 이해한다는 건, 인간을 이해하는 일과 닮아 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면서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때로는, 그 모호함 속에서 엄청난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

 

그 선택이 세계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이제 우리는 그 여정을 따라가려 한다.

 

1장
시작은 땅이 아니라 신화였다: 루스인의 나라
러시아라는 이름은 ‘러시아’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곳에 ‘러시아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 시작은 북유럽의 바다에서 왔다. 오늘날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를 누비던 바이킹들, 그중에서도 동쪽으로 향한 무리를 **‘루스인(Rus)’**이라 불렀다. 그들은 배를 타고 강을 따라 내려왔다. 도시는 없었고, 국경도 없었으며, 체계적인 문명도 없었다. 오직 물길, 숲, 그리고 거래할 무언가가 있을 뿐이었다.

 

이 루스인들이 흑해 근처에 도달해 만든 거점이 바로 ‘키예프 루스’, 러시아가 최초로 국가라는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 공간이다. 흥미롭게도, 이 국가는 한 민족의 창조물이 아니라 다양한 종족이 얽혀 형성된 일종의 ‘문명 실험실’이었다. 슬라브인, 루스인, 스칸디나비아인, 핀-우그리아계, 튀르크계. 이질적인 존재들이 섞여 만든 공동체는 일관성보다 유연성을 택해야 했다. 따라서 이들의 국가는 전통보다는 신화를 중심으로 뭉쳤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답은 단순했다. “우리는 북쪽의 강에서 왔다. 그리고 이제 이 강을 따라 살아간다.”
그 단순한 신화가 오히려 강력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국가는 피로 맺은 혈연이 아니라, 물길과 무역, 그리고 신에 대한 믿음으로 연결된 네트워크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중대한 결정이 내려졌다.
988년, 키예프 루스의 대공 블라디미르 1세는 기독교, 정확히는 비잔틴 제국의 정교회를 받아들인다. 이유는 단순했다. 종교는 곧 질서였고, 질서는 곧 통치였다. 하지만 그 결정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파문을 남겼다.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건 단지 예배의 방식이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정체성의 설계도’를 수입하는 일이었다. 비잔틴 제국은 단지 종교국가가 아니었다. 신과 황제가 하나 되는 구조, 즉 ‘신정일치’의 국가였다. 키예프 루스는 그 모델을 그대로 복제했다.
국가는 곧 신의 그림자, 왕은 곧 신의 대리자.

 

여기서 러시아적 정치문화의 뿌리가 시작된다.
민중은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절대적 존재에 자신을 바친다.
국가는 잘못할 수 있지만, 버려선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늘 아래의 유일한 질서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가장 무서운 말은 “이것은 신의 뜻이다”일지도 모른다.
러시아는 그것을 일찍 배웠고, 이후 천 년 가까이 그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 키예프 루스는 오래가지 못했다. 13세기, 유라시아의 어딘가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러시아 전역은… 그들에 의해 뒤덮인다.

몽골이 온다.


2장
정교와 칼: 모스크바, 제3의 로마를 꿈꾸다
몽골이 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칭기즈 칸의 손자 바투가 이끄는 킵차크 칸국, 혹은 ‘황금의 무리’가 동쪽에서 들이닥쳤다. 1240년, 키예프는 초토화되었고, 한때 번영했던 루스인의 공동체는 불타는 도시와 침묵한 성당만 남긴 채 무너졌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무너진 도시보다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다.

 

키예프가 사라진 뒤, 새로운 중심지는 모스크바였다. 처음엔 이름도 힘도 미약한 도시였지만, 이들은 한 가지를 잘했다. 몽골에 복종하는 법. 다른 루스 공국들이 몽골에 저항하다 사라지는 동안, 모스크바는 세금 징수를 대신하며 살아남았다. 외세의 하수인이라는 멸시를 감수하고도, 그들은 한 가지를 꿈꿨다.
이제 우리 차례다.

 

수세기가 흐르며 몽골의 권력이 약해지자, 모스크바는 움직였다.
교묘한 외교와 결혼 전략, 경제력으로 경쟁 공국들을 흡수했고, 마침내 1480년, 이반 3세가 몽골의 ‘속국’ 신분을 버리고 자유를 선언했다. 하지만 자유는 곧 진공 상태였다. 외세가 물러나자, 그 빈자리에 또 다른 절대권력이 들어선다.

 

이반 3세는 단순한 대공이 아니라, 차르(황제)가 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단지 왕의 호칭이 아니라, 그 호칭을 정당화하는 서사였다.

 

이때 러시아는 놀라운 서사 하나를 만들어낸다.
"비잔틴이 무너졌다. 로마 제국의 영광은 끝났다. 하지만 그 정신은 이어진다.
로마가 첫 번째, 콘스탄티노플이 두 번째, 그리고 이제는…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다."

 

이 말 한마디가 수백 년을 지배한다.
‘모스크바는 마지막 성지이며, 세계의 진정한 중심이다’라는 이 신화는 단지 자존심이 아니라, 자기 정체성의 핵심이 된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왜 러시아는 유럽이 되려 하지 않고, 유럽을 초월하려 했는가?
왜 모스크바는 늘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붙이려 했을까?

 

그것은 공포 때문이다.
러시아는 항상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다. 동쪽의 몽골, 서쪽의 폴란드와 독일, 남쪽의 이슬람. 사방에서 위협받는 이 땅에서, 자신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자신을 절대적인 존재로 신격화하는 것이었다.

 

그 중심에 정교회가 있었다.
모스크바의 교회는 단지 예배당이 아니라, 제국의 심장이었다. 황제는 신의 대리인이 되었고, 백성은 복종이 곧 구원이라는 메시지를 믿었다. 여기에 칼이 더해졌다. 무릎 꿇지 않는 자는 신의 질서를 어지럽힌 자였다.

 

이 시기부터 러시아는 단순한 국가가 아니라, 하늘과 연결된 정치체제가 된다.
그래서 러시아에서 반역은 죄이기 전에 ‘신성모독’이었다.
이 구조는 차르가 바뀌어도, 체제가 변해도, 거의 그대로 유지된다.

 

정교와 칼.
러시아는 이 두 개의 기둥 위에 제국을 세웠다. 하나는 하늘로, 하나는 피로.

 

3장
이반 뇌제와 공포의 유산
러시아 역사에서 ‘공포’라는 단어를 하나의 제도로 만든 사람,
그 이름은 이반 4세, 우리가 흔히 부르는 이반 뇌제(Ivan the Terrible)이다.
서구 언론은 그를 ‘무서운 이반’이라 번역하지만, 실제로는 ‘엄격하고 경외스러운 이반’이라는 뉘앙스가 더 정확하다. 그는 악당이 아니라, 자신을 하늘 아래 가장 정당한 인간이라 믿었던 사람이다.

 

이반은 1547년, 스스로를 최초의 ‘러시아 차르’로 선언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왕(King)’이 아닌 ‘차르(Tsar)’라는 호칭이다.
‘차르’는 라틴어 카이사르(Caesar)에서 유래된 말로, 로마 제국 황제를 뜻한다.
즉, 이반은 단순히 한 지역의 통치자가 아니라, 역사와 신의 후계자를 자처한 것이었다.

 

하지만 신이 인간에게 주는 권력에는 언제나 그림자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는 즉위 초기에 개혁가였다. 법전을 정비하고, 귀족들의 권한을 제한하며, 국가의 효율을 높였다. 하지만 그 개혁은 곧 의심으로, 그 의심은 공포로 변질되었다.

 

1553년, 이반은 병에 걸려 쓰러졌고, 후계자 문제로 귀족들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그는 깨달았다. “나는 병들면 국가가 흔들린다. 나는 없어도 되는 존재가 아니구나.”
이 깨달음은 그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이반은 돌아왔다.
하지만 이제 그는 인간이 아니라 의심 그 자체였다.
자신을 배신할지 모를 귀족들, 반란을 꿈꾸는 지방 관료들, 종교 권위마저 의심했다.
그리고 그는 국가적 테러조직을 만든다. 이름하여 오프리치니키(Oprichniki).

 

검은 옷을 입고, 말을 타며, 개와 빗자루 문장을 단 자들.
‘개처럼 물고, 빗자루처럼 쓸어버리겠다’는 이 조직은 러시아 역사상 최초의 국가 주도 폭력집단이었다. 그들은 재판도 없이, 증거도 없이, 왕의 명령만으로 처형을 집행했다.

 

이반은 스스로 신이 만든 질서의 수호자라 믿었고,
그 질서를 해치는 자는 누구든 국가가 아니라 ‘성스러운 의무’로써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565년, 그는 말한다.
“모스크바는 신의 도시다. 그 신의 뜻은 오직 나만이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이 러시아가 만든 최초의 ‘공포의 공식’이다.
공포 = 충성 = 질서.

 

그 후 러시아인의 머릿속에는 이상한 공식 하나가 자리 잡는다.
국가가 무서울수록, 세상은 안정되고,
왕이 잔혹할수록, 하늘의 뜻에 가깝다고.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아마도 그의 마지막에 가까운 순간일 것이다.
이반은 분노에 휩싸여, 자신의 친아들을 지팡이로 때려 죽인다.
그 순간의 공포는 러시아의 트라우마로 남았고, 그가 만든 제도적 공포는 이후의 모든 차르, 심지어 스탈린에게도 계승된다.

 

그는 권력에 미친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너무나도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헤드라인경제신문 기자 auroraa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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