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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기축통화의 권력, 돈이 만든 제국의 그림자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은 군사력도, 기술력도 아니다. 바로 ‘통화(貨幣)’다. 그중에서도 기축통화(基軸通貨, Reserve Currency)는 국가 간 거래와 국제 무역, 자본 이동의 기준이 되는 중심 통화다. 다시 말해, 세계가 공통으로 신뢰하고 사용하는 ‘세계의 돈’이다.

 

 

오늘날 그 자리를 차지한 통화는 단연 미국 달러다. 하지만 달러가 처음부터 세계의 표준이었던 것은 아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기축통화의 자리는 시대의 패권 국가가 차지했다.

 

17세기에는 스페인의 은화(스페인 달러)가 유럽과 아메리카를 잇는 무역의 중심이었다. 이후 영국의 산업혁명과 해상 패권이 확립되면서 19세기에는 파운드화가 세계의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경제력과 금 보유량을 유지한 미국이 주도한 브레튼우즈 체제 아래에서, 달러는 금과 직접 교환 가능한 유일한 화폐로 지정되며 세계의 중심에 섰다. 그 결과, ‘달러=기축통화’라는 공식이 탄생했다.

 

하지만 기축통화의 지위는 단순한 경제 문제를 넘어 ‘신뢰’의 문제다. 전 세계가 미국 달러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단지 미국이 부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금융 시스템과 정치적 안정성, 그리고 그 통화가 전 세계 어디서나 교환 가능하다는 ‘신뢰’ 때문이다. 즉, 기축통화는 패권의 상징이자, 신뢰의 총합이다.

 

달러의 지위는 미국 경제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왔다. 가장 큰 혜택은 ‘달러를 찍어낼 수 있는 나라’라는 특권이다. 미국은 무역 적자가 나도 자국 통화를 더 발행해 세계에 팔 수 있다. 다른 나라라면 외환보유고가 줄어 위기를 맞지만, 미국은 오히려 세계가 달러를 원하기 때문에 문제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달러의 기축통화 프리미엄’, 즉 세뇨리지(seigniorage) 효과다. 쉽게 말해, 미국은 자국 화폐를 수출해 실제 재화를 수입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 특권은 동시에 불균형의 씨앗이기도 하다. 달러의 과잉 공급은 세계 금융 불안을 확대하고, 미국 내부의 경기 부양 정책이 곧 전 세계 자본시장에 파장을 미친다. 2008년 금융위기 때 그 구조가 여실히 드러났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는 전 세계 신용시장을 동시에 흔들었고, 달러 중심의 금융 체계가 가진 취약성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러는 무너지지 않았다. 위기 때마다 달러 수요는 오히려 폭등했다. 왜냐하면 세계가 불안할수록 ‘달러는 안전하다’는 신뢰가 강화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축통화의 아이러니다 — 발행국의 실수로 위기가 시작돼도, 위기가 심해질수록 그 나라의 통화가 더 강해지는 현상.

 

최근에는 기축통화 다극화 논의가 다시 활발해지고 있다. 중국은 위안화 국제화를 추진하며, ‘디지털 위안화(CBDC)’와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통해 결제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있다. 유럽은 유로화를 중심으로 독자적 금융권역을 유지하고, 중동·러시아는 에너지 결제를 비달러화로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시도가 달러의 아성을 흔들기에는 아직 미약하다.

 

기축통화의 조건은 단순히 경제 규모가 크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① 안정된 정치 체제,
② 깊고 개방된 금융시장,
③ 법적 신뢰성,
④ 자본 이동의 자유,
⑤ 군사·외교적 영향력
이 다섯 가지 조건이 함께 충족되어야 한다.
현재 이 모든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나라는 여전히 미국뿐이다.

 

물론 변화의 조짐은 있다. 세계 각국이 외환보유고에서 달러 비중을 줄이고 금, 위안화, 유로, 엔화를 다양하게 섞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 통계에 따르면, 달러 비중은 20년 전 70%에서 최근 58%대로 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절반 이상이 달러 기반이며, 국제무역의 80% 이상이 달러로 결제된다.

 

기축통화는 결국 ‘경제력 + 신뢰 + 시간’이 만든 구조다. 달러를 대체할 통화가 등장하려면, 단순히 경제가 커지는 것을 넘어 **“세계가 신뢰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춰야 한다. 지금 중국이 위안화를 앞세워 국제결제를 늘리고 있지만, 자본 통제가 여전하고 법적 투명성이 낮기 때문에 글로벌 투자자들은 여전히 달러를 선택한다.

 

기축통화의 역사는 곧 세계 질서의 역사다. 파운드에서 달러로,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통화로의 이동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 변화는 천천히, 세대 단위로 진행된다. 돈은 단순한 교환의 수단이 아니라 ‘신뢰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세계는 달러에 의존하면서도 그로 인한 불평등을 비판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달러를 대체할 통화는 아직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달러 중심 체제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 경제가 어떻게 자립적 기반을 갖추고 외환 리스크를 줄일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달러가 패권을 쥐고 있는 동안, 다른 나라들은 늘 ‘기축통화 외곽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언젠가, 기술과 신뢰가 맞물린 새로운 질서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그때는 국가 간의 힘이 아니라, 신뢰를 쌓은 시스템이 기축이 되는 시대, 즉 ‘신뢰의 통화’ 시대가 열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 금융 균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