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청교도 혁명과 왕의 처형 – 권력의 얼굴을 바꾸다 1649년 1월 30일, 런던의 추운 겨울 아침. 찰스 1세가 단두대로 향했다. 군중은 침묵했고, 군인들의 창끝은 긴장처럼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 순간, 세계는 알지 못한 채 한 경계를 넘었다. 인간이 신의 이름으로 세운 왕을, 인간이 다시 법의 이름으로 처형한 것이다. 청교도 혁명, 또는 잉글랜드 내전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의 정체에 대한 질문이었다. 왕은 누구의 대리자인가? 신인가, 국민인가? 수백 년 동안 당연하게 여겨졌던 왕권신수설은 이 질문 앞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찰스 1세는 스스로를 절대군주로 여겼고, 신의 권위로 세금을 걷고, 의회를 무시했으며,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묻기 시작했다. ‘왜?’ 청교도들은 단지 종교적 신념의 공동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국가의 질서를 바꾸고자 한 이념의 실천가들이었다. 그들의 이상은 간단했다. “신 앞에 평등한 인간은, 법 앞에서도 평등해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은 결국 “왕도 예외가 아니다”라는 급진적 결론으로 이어진다. 1642년, 내전이 시작되었다. 왕당파와 의회파가 충돌했고, 나라는 둘로 갈라졌다. 전쟁은 단지 군사
제4장. 노르만의 정복 – 혈통이 아닌 체계의 승리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윌리엄이 승리한 것은 단순한 전투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제도와 질서, 기록과 언어라는 거대한 물결이 브리튼을 덮친 순간이었다. 역사상 많은 전쟁이 왕조를 바꾸었지만, 이 정복은 더 근본적인 것을 바꾸었다. 바로 나라가 사람의 것이 아닌 시스템의 것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윌리엄은 단지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군인이 아니었다. 그는 중세 유럽에서 가장 정교한 봉건제도와 행정 체계를 몸에 익힌 관리자였다. 그가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한 근거는 혈통이었다. 그러나 그가 지배를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철저한 통치 기획에 있었다. 윌리엄은 왕이 된 이후, 잉글랜드 전역을 대상으로 역사상 최초의 전국 토지 조사인 ‘둠스데이 북’을 제작한다. 이 조사는 단순한 세금 장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땅이 누구의 소유인지, 얼마나 되는지, 그 땅에 사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문서화한 최초의 중앙 권력의 시도였다. 말하자면, 이때부터 잉글랜드는 땅보다 문서를 통해 다스려지기 시작했다. 무력의 시대에서 행정의 시대로 넘어가는 징조였다. 흥미롭게도, 윌리엄이 이끈 노르만 정복은 왕만 바꾼 것이
제1장. 브리튼 섬의 시작 – 로마 이전의 시간들 우리는 종종 역사를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브리튼의 역사는 이름도, 국경도, 지도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기부터 시작된다. 그 시기의 사람들은 자신이 '영국인'이라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들은 단지 살아 있었다. 추위 속에서 사냥을 했고, 돌을 쌓아 신을 만들었으며, 별을 보며 방향을 잡았다. 이들을 오늘날 우리는 '브리튼의 선사인류'라고 부르지만, 그들에게는 스스로를 그렇게 부를 언어조차 없었다.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유럽으로 이주한 뒤, 해협을 건너 브리튼섬에 정착한 것은 약 40,000년 전의 일이다. 당시 브리튼은 대륙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고, 인간은 땅을 따라 이동했다. 그러나 기후가 따뜻해지며 빙하가 녹고,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브리튼은 섬이 되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고립은 이 섬의 숙명이 되었다. 고립은 방어의 장점이자 발전의 장애물이었고, 그 이중성은 앞으로 수천 년간 반복되는 테마로 작용한다. 이 땅의 초기 거주민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야만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연을 읽는 데 있어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감각을 지녔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방식
7장. 국민당 정부 이주와 장제스 체제 — 전환의 시간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났다. 일본은 항복했다. 대만은 반세기 만에 다시 새로운 이름으로 넘어갔다. 이번에는 중화민국의 이름으로. 그러나 이 새로운 통치는 환영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식민지 억압이 끝나기를 바랐던 대만인들은, 또 다른 억압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당시 대륙의 국공 내전은 격렬하게 진행 중이었다. 국민당 정부는 일본 패망 직후 혼란 속에 대만 행정을 인수했다. 장제스 정권은 대만을 전후 복구와 반공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그 접근은 대만 사회의 복잡한 정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이루어졌다. 국민당이 파견한 관료들은 종종 본토에서 부패와 무능으로 악명 높던 관리들이었다. 그들은 일본 식민 체제의 인프라를 장악하는 데 급급했고, 민생 문제는 뒷전이었다. 물가는 폭등했고, 통화 개혁은 실패했다. 시장에는 가짜 상품과 암거래가 판쳤다. 그 와중에 공공 자산은 사유화되었고, 국민당 관료들과 그 측근들은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대만인 사회는 분노로 들끓었다. “일본인보다 더 못한 지배자들이다.” 이런 말이 골목마다 돌았다. 그 분노는 곧 폭발했다. 1947년 2월 27일
4장. 정성공과 한족 이주 — 귀명항청과 새로운 충돌 1661년 봄, 거센 바람과 검은 파도를 뚫고 수백 척의 군선이 남중국해를 가르며 전진하고 있었다. 배마다 노쇠한 병사들과 갓 징발된 농민들, 식량과 무기가 실렸다. 그들의 목적지는 명확했다. 대만 — 잃어버린 이상을 되찾기 위한 최후의 거점. 그들을 이끈 이는 정성공(鄭成功), 명나라 충신이었다. 명나라는 이미 북경에서 무너졌고, 남부의 마지막 저항도 꺼져가고 있었다.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단 하나였다 — 반청 복명(反清復明). 대만은 그 꿈을 위한 무대가 될 운명이었다. 정성공의 함대는 타이난 인근에 상륙했고, 네덜란드군은 젤란디아 성에서 결사 항전했다. 9개월간의 포위전 끝에 성문은 열렸다. 네덜란드 깃발은 내려오고, 정성공의 군대가 섬을 장악했다. 이로써 유럽 열강의 시대는 일단 막을 내렸다. 그러나 진짜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정성공의 이상과 현실은 곧 충돌했다. 그는 대만을 명나라의 임시 수도, 복명 운동의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섬 전체에 명나라 연호를 사용하고, 청조 관복을 금지하며, 중앙 집권적 군정을 수립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