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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시간에 끝내는 고려시대 이야기

 

제1장 고려의 건국과 태조 왕건
고려는 단순히 하나의 왕조가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고, 다양한 세력들이 충돌하고 융합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신라의 기나긴 역사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새로운 시대가 필요했다. 고려는 그 혼란의 시대 속에서 등장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 사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왕건.
그는 단순한 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가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란 개국 군주였다. 그의 꿈은 단순한 정복이 아니었다. 그는 혼란을 하나로 모으고, 부서진 것들을 다시 잇는 사람이었다.

 

고려 건국의 배경
후삼국 시대와 고려의 등장
10세기 초, 한반도는 다시 세 개의 나라로 나뉘어 있었다. 오랫동안 존속해 온 신라는 더 이상 예전의 신라가 아니었다. 왕권은 약해졌고, 귀족들의 권력이 강해졌다. 백성들은 신라를 버렸고, 새로운 나라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 틈을 타서 등장한 것이 후고구려(태봉)와 후백제였다.
후백제는 견훤이 세웠다. 그는 신라의 장군이었으나, 신라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라를 배신했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 후백제는 한반도의 서남부를 차지하며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신라를 압박했다.
후고구려(태봉)는 궁예가 세웠다. 그는 신라 왕족 출신이었으나, 신라에서 버림받았다. 그는 신라에 반기를 들었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점점 독재적으로 변해갔고, 그의 신하들은 점점 그를 멀리했다.
궁예의 나라가 흔들리고 있을 때, 왕건이 등장했다.

 

태봉(후고구려)과 궁예의 몰락
왕건은 본래 송악(개성) 지역의 유력 호족이었다. 그의 가문은 오랫동안 해상 무역을 통해 막강한 부를 쌓았고, 그 지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궁예는 왕건을 신뢰했고, 그를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였다. 왕건은 뛰어난 전략가였고, 궁예의 군대를 이끌고 각지를 정벌하며 명성을 쌓았다.
그러나 궁예의 통치는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신하들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자신의 가족까지 처형했다. 그의 폭정에 신하들은 등을 돌렸고, 그를 대신할 새로운 지도자를 찾았다.
결국, 918년. 궁예는 왕건에 의해 폐위되었다.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그 나라의 이름이 고려였다.
고려는 단순한 후고구려의 연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나라였다. 신라, 백제, 고구려의 전통을 잇되,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했다.

 

태조 왕건의 정책과 고려 왕조의 기틀
왕건은 단순한 군사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국가를 세우고, 그 국가가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기틀을 다지는 사람이었다. 그는 군사력뿐만 아니라 외교와 정책을 통해 고려를 하나로 묶었다.

 

호족 연합 정책과 혼인 정책
고려는 처음부터 강한 왕권을 가질 수 없었다. 후삼국 시대의 혼란 속에서 살아남은 강력한 세력은 왕건이 아니라 호족들이었다. 그들은 각 지역을 다스리는 유력한 가문들이었고, 고려 왕조의 안정을 위해서는 이들과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왕건은 무력으로 그들을 제거하는 대신, 호족 연합 정책을 펼쳤다.
그는 호족들에게 관직을 주고, 고려의 신하로 받아들였다.
그들과의 혼인 정책을 통해 왕실과 호족 가문들을 하나로 엮었다.
송악(개성)을 수도로 삼아, 호족 세력과의 균형을 유지했다.
이 정책 덕분에 고려는 급격한 내분 없이 안정적인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왕건은 호족들의 힘을 빌려 고려를 세웠지만, 동시에 그들의 힘을 견제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훈요십조와 왕권 강화 노력
왕건은 단순히 고려를 세운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고려가 흔들리지 않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후손들에게 훈요십조라는 유지를 남겼다.
훈요십조는 단순한 유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려 왕조가 지켜야 할 기본 원칙이었으며, 왕건이 꿈꾼 나라의 모습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불교를 중시할 것
- 풍수지리를 고려하여 수도를 정할 것
- 왕위 계승은 정당한 혈통에서 이루어질 것
- 신라의 문화를 존중할 것
- 백성을 보호할 것
- 호족들과 협력할 것
- 사치와 낭비를 피할 것
- 외세와 조심스럽게 관계를 맺을 것
- 군대를 신뢰할 것
- 나라의 질서를 유지할 것
이것은 고려 왕조가 500년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왕건은 단순히 왕으로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했다.

 

북진 정책과 발해 유민 포섭
왕건은 단순히 후삼국을 통합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고려를 한반도의 중심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그는 북진 정책을 추진했다. 그의 목표는 단순히 한반도 내에서의 통합이 아니라,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는 발해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발해는 거란(요나라)에 의해 멸망했지만, 왕건은 발해 유민들을 고려의 백성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압록강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거란의 남하를 견제했다.
그는 고려가 단순한 신라의 연장선이 아니라, 고구려의 후계국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이러한 정책 덕분에 고려는 단순한 신라의 후계국이 아니라, 고구려-발해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국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마무리: 태조 왕건이 남긴 것들
왕건은 단순한 개국 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혼란한 시대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고, 고려가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가 남긴 것들은 다음과 같다.
-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
- 호족과의 협력과 왕권 강화
- 훈요십조를 통한 왕조의 기본 원칙 확립
- 북진 정책과 발해 유민 포섭
그는 943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세운 고려는 500년 동안 지속되었고, 한반도의 중심 국가로 성장했다.
왕건은 왕이었지만, 단순한 왕이 아니었다. 그는 고려를 세운 사람이었고, 고려를 고려답게 만든 사람이었다.

 

제2장 고려의 정치 제도와 사회 구조
고려의 나라는 단단한 듯하면서도 흐물거렸다. 왕은 있었으나, 귀족들이 권력을 나누어 가졌고, 백성들은 신분의 틀 속에서 조용히 살아가야 했다. 나라의 기틀은 불교와 유교의 가르침 속에서 다져졌고, 법은 있었으나 모든 이들에게 공평한 것은 아니었다. 높은 자리는 문벌귀족들이 차지했고, 때로는 학문이, 때로는 무력이 권력을 결정했다.
그 속에서도 세상은 돌아갔다. 권력이 오가고, 제도가 바뀌고,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했다. 고려는 무너지지 않았으나, 결코 한 사람의 것이 될 수도 없었다.

 

고려의 중앙 정치 제도
왕이 나라를 다스린다고 하지만, 왕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고려는 여러 개의 기둥 위에 세워진 나라였다. 왕이 한마디 하면 그 말이 곧 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신하들이 모여서 의논하고, 왕이 그들을 조정해야 했다. 고려의 정치는 단순하지 않았다.
2성 6부제와 중서문하성의 역할
고려의 중앙 정치 체제는 2성 6부제였다. 나라를 움직이는 큰 틀은 두 개의 기관이 맡았다.
중서문하성: 왕의 명령을 듣고 나라의 정치를 논의하는 곳이었다. 이곳에는 문벌귀족들이 모여 왕과 함께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결정했다.
상서성: 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이곳에서 실제로 나라의 살림을 운영했다.
중서문하성 아래에는 6개의 부서가 있었다.
이부 – 관리를 임명하는 곳.
병부 – 군사를 담당하는 곳.
호부 – 세금과 백성을 관리하는 곳.
형부 – 법과 형벌을 다루는 곳.
공부 – 토목과 건축을 맡는 곳.
예부 – 외교와 의례를 담당하는 곳.
이것이 고려의 뼈대였다. 하지만 그 뼈대만으로는 나라가 굴러가지 않았다. 진짜 권력은 어디서 흘러가는가를 보아야 했다.

 

도병마사와 식목도감
고려의 진짜 권력은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에서 움직였다.
도병마사는 군사 문제를 논의하는 곳이었다. 왕이 명령을 내릴 수는 있었으나, 그 명령이 실제로 실행되려면 도병마사의 동의가 필요했다. 나라가 전쟁을 해야 할 때, 새로운 군대를 만들어야 할 때, 모든 것은 이곳에서 결정되었다.
식목도감은 법과 제도를 만드는 곳이었다. 왕이 법을 만들 수는 있었으나, 그것이 나라의 법으로 자리 잡으려면 이곳에서 논의되어야 했다.
이 두 기관의 특징은 바로 귀족들이 주도했다는 점이었다. 왕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를 이끌던 문벌귀족들이 함께 나라를 운영했다. 이곳에서 결정된 것은 왕도 쉽게 바꿀 수 없었다. 왕이 강하면 나라가 안정되었고, 왕이 약하면 귀족들이 서로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과거제 시행과 관리 등용
그러나 고려의 정치는 귀족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고려는 문벌귀족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재를 뽑기 위해 과거제를 시행했다.
문과 – 학문을 통해 벼슬길에 오르는 시험. 성리학과 유교 경전을 시험했다.
잡과 – 기술 관리를 뽑는 시험. 의술, 천문학, 역법 등을 담당하는 자들을 선발했다.
승과 – 불교를 공부한 자들을 승려로 선발하는 시험.
과거제는 신분이 낮은 자들에게도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과거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방의 향리나 중류층 이상만이 과거를 볼 수 있었고, 농민과 노비들에게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과거를 통해 출세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결국 고려의 정치 권력은 문벌귀족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왕이 강하면 그들을 억눌렀고, 왕이 약하면 그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했다.

 

고려의 지방 행정 제도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중앙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방에도 관리가 있었고, 그곳에서도 권력은 움직이고 있었다.
5도 양계 체제
고려의 지방 행정은 5도 양계로 나뉘었다.
5도 – 일반 행정 구역으로, 평안도,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충청도를 포함했다.
양계 – 북방의 군사적 요충지로, 동계와 서계로 나뉘었다.
5도에는 안찰사가 파견되어 치안을 유지했고, 양계에는 병마사가 군사적 방어를 맡았다.
주현과 속현의 운영
고려의 지방은 주현과 속현으로 나뉘었다.
주현은 고려의 직접적인 통치 아래에 있는 지역이었고, 고려의 관리가 파견되었다.
속현은 지방 호족이 직접 다스리는 곳이었다.
속현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고려의 중앙정부는 모든 지방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다. 지방의 힘이 여전히 강했고, 고려는 그들을 견제하며 함께 나아가야 했다.

 

향리와 지방 호족의 역할
고려의 지방은 향리들이 다스렸다. 향리는 신라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지방 행정관으로, 지방 호족의 후손들이 많았다. 그들은 고려 정부의 지시에 따라 지방을 운영했지만, 그들 또한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 했다.
향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았고, 고려 후기에는 신진사대부들이 향리 출신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고려의 사회 구조와 신분제
양반, 중류층, 평민, 천민
고려의 신분제는 엄격했다.
양반 – 문벌귀족과 고위 관리들이 포함된 상류층.
중류층 – 기술직 관리, 지방 향리, 서리 등.
평민 – 농민과 상인. 대부분이 이 계층에 속했다.
천민 – 노비, 백정, 광대 등.
노비 제도와 백정의 삶
고려의 노비는 신분적 천민이었고, 고려의 경제적 기반 중 하나였다. 백정은 주로 도축업에 종사했으며, 사회적 차별을 받았다.

 

불교와 유교의 사회적 영향
불교는 고려 사회를 지배했다. 불교 사찰이 경제와 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고려 후기로 가면서 성리학이 도입되었고, 유교적 가치가 점점 사회를 바꾸기 시작했다.
이렇게 고려는 강한 왕조였지만, 내부적으로는 끊임없는 변화와 갈등 속에서 성장해 나갔다.

 

제3장 고려의 외교와 군사
고려의 역사는 전쟁과 외교의 연속이었다. 왕들은 적과 싸웠고, 신하들은 말과 글로 나라를 지켰다. 백성들은 칼과 화살 사이에서 삶을 이어갔다. 고려는 스스로를 천자의 나라라 불렀지만, 현실은 달랐다. 북쪽의 강대한 세력들은 고려를 탐냈고, 서쪽과 남쪽에서는 바다를 건너온 자들이 약탈을 일삼았다. 고려는 언제나 싸움 속에서 존재했고, 그 속에서 더욱 단단해졌다.
고려의 왕들은 신하들에게 물었다.
나라를 지키는 것이 무엇인가.
어떤 신하는 말로 대답했고, 어떤 신하는 칼을 들었다. 고려의 역사는 그렇게 흘러갔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 (993~1019년)
거란은 고려를 자신의 속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들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말하였다.
우리와 형제가 되어라. 그렇지 않으면 칼을 들겠다.
고려는 이에 대답해야 했다. 항복이냐, 전쟁이냐. 그러나 고려는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았다. 고려는 말로 전쟁을 이겼고, 칼로 승리를 굳혔다.

 

서희의 외교와 강동 6주 획득
993년, 거란이 고려를 침략했다. 고려의 왕은 불안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나섰다.
서희였다.
그는 말했다.
전쟁 없이 땅을 얻는 것이 외교다.
그는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다. 거란은 고려를 압박했다.
신라가 한때 당의 신하였던 것처럼, 고려도 우리에게 조공을 바쳐야 한다.
서희는 반박했다.
고려는 고구려의 후손이다. 우리의 땅을 되찾을 뿐이다.
그는 말로 거란을 물리쳤고, 오히려 강동 6주(철원, 이천, 통주, 귀주, 곽주, 흥화진)를 얻어냈다. 고려의 국경선은 압록강 가까이로 밀려났다. 말이 전쟁을 대신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거란은 쉽게 물러날 자들이 아니었다.

 

강조의 정변과 거란의 재침
1010년, 고려 내부에서 일이 벌어졌다.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왕위에 앉혔다. 거란의 황제 성종은 이를 빌미로 다시 침략했다. 개경이 불탔다. 고려의 왕은 남쪽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고려는 무너지지 않았다. 산성을 지켰고, 버텼다. 거란은 개경을 불태우고 돌아갔다. 고려는 다시 수도를 복구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강감찬의 귀주대첩 (1019년)
1019년, 거란이 다시 침공했다. 이번에는 10만 대군이었다. 고려는 이를 막아야 했다. 왕은 강감찬을 불렀다. 그는 말했다.
칼로만 싸우는 것이 전쟁이 아니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넜다. 귀주에서 적을 기다렸다.
거란이 퇴각할 때, 고려군이 습격했다. 적은 달아날 곳이 없었다. 강이 얼어붙었다. 고려군은 그 위에서 싸웠다. 거란군은 차례로 강에 빠져 얼어 죽었다.
이 전투에서 거란군 10만 명 중 살아 돌아간 자는 2천 명뿐이었다. 고려는 승리했다. 귀주대첩은 고려의 이름을 더욱 빛냈다.

 

고려와 여진, 몽골의 관계
거란이 무너지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여진이었다. 그들은 고려의 북쪽에서 힘을 키우고 있었다. 고려는 선택해야 했다. 그들을 막을 것인가, 그들과 화친할 것인가.
여진 정벌과 윤관의 별무반
고려는 여진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들은 점점 강해졌고, 국경을 넘나들었다. 고려의 윤관은 이에 대비해 별무반을 조직했다.
기병 신기군
보병 신보군
승병 항마군
윤관은 군을 이끌고 여진을 공격했다. 승리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여진은 다시 일어섰다. 마침내 그들은 금나라를 세웠고, 고려는 그들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다.
그러나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몽골의 침략과 강화도 천도
몽골이 등장했다. 고려는 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나 몽골은 거란도, 여진도 아니었다. 그들은 한 번 들어오면 남김없이 불태웠다.
고려의 왕은 선택했다. 수도를 버리고 강화도로 도망쳤다.
몽골은 육지의 고려를 불태웠다. 그러나 고려는 바다 위에서 버텼다. 몽골은 끝까지 고려를 무너뜨리지 못했다.

 

삼별초의 저항과 고려의 원 간섭기
그러나 고려는 몽골과 타협했다. 왕은 다시 개경으로 돌아갔고, 고려는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이 있었다. 삼별초였다.
그들은 끝까지 싸웠다. 먼저 강화도에서 버텼다. 이후 제주도로 갔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모두 죽었다. 고려는 이제 원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고려와 고려 말 왜구의 침략
이제 고려는 또 다른 적과 싸워야 했다. 바다 너머에서 온 자들이었다.
왜구의 침입과 박위, 최영의 방어전
왜구는 바다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마을을 불태우고, 백성을 죽였다. 고려는 그들을 막아야 했다.
박위는 대마도를 공격했다. 최영은 군대를 이끌고 왜구를 쫓았다. 고려는 그들을 막아내긴 했으나, 상처는 컸다.
홍산대첩, 진포대첩, 황산대첩
홍산대첩 – 최영이 이끌었다. 왜구를 섬멸했다.
진포대첩 – 최무선이 화포를 사용해 왜구를 불태웠다.
황산대첩 – 이성계가 왜구를 쫓아가 모두 무찔렀다.
고려는 마지막까지 싸웠다. 그러나 그 끝은 조선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고려 말 외교와 명나라와의 관계
명나라가 등장했다. 고려는 그들에게 기울었다. 그러나 이제 고려는 더 이상 고려가 아니었다. 왕은 약했고, 신하는 나뉘었다.
마침내, 이성계가 새 시대를 열었다. 고려의 외교와 전쟁은 끝이 났고, 새로운 나라가 탄생했다.
그러나 고려는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싸웠고, 버텼고, 끝까지 고려를 지키려 했다. 그것이 고려의 외교였고, 고려의 군사였다.

 

제4장 고려의 경제와 농업
고려의 땅은 넓었다. 강도 있었고, 바다도 있었다. 산이 많았고, 평야도 있었다. 사람들은 땅을 일구고, 강을 따라 물고기를 잡았으며, 바다를 건너 무역을 했다. 개경의 시장은 활기를 띠었고, 서경의 장터는 북방의 물건들로 넘쳐났다. 고려의 도공들은 불가마 앞에서 땀을 흘렸고, 대장장이들은 쇠를 두드렸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누구는 부유했고, 누구는 가난했다. 땅을 가진 자들은 더욱 많은 것을 가지려 했고, 가지지 못한 자들은 더욱 힘들어졌다. 고려의 경제는 그렇게 돌아갔다.
고려의 토지 제도와 전시과
나라가 안정되려면 땅이 중요했다. 땅이 있어야 사람이 살고, 나라가 움직인다. 고려는 전시과라는 토지 제도를 운영했다.

 

전시과의 운영과 개혁
전시과는 고려의 관리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제도였다. 하지만 이 땅은 영원한 것이 아니었다. 관리가 벼슬을 하면 땅을 받고, 벼슬을 그만두면 다시 국가에 돌려주어야 했다.
전시과는 세 차례에 걸쳐 개편되었다.
경종의 시정 전시과: 고려 초기에 시행된 전시과. 문무 관리, 군인, 지방 향리 등에게 땅을 나누어 주었다.
목종의 개정 전시과: 문벌귀족들이 힘을 키우자, 더 높은 관리들에게 더 많은 땅을 주도록 바꾸었다.
문종의 경정 전시과: 이제는 18등급으로 나누어, 벼슬에 따라 정밀하게 땅을 나누어 주었다.
전시과는 나라의 뼈대와 같았다. 관리들은 토지를 받기 위해 벼슬길에 나섰고, 백성들은 이 땅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제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고려 후기의 토지 겸병 문제
고려가 후반부로 가면서, 원칙은 사라졌다. 땅을 가진 자들은 더 많은 땅을 원했다. 귀족들과 권문세족들은 전시과의 규정을 무시하고, 토지를 개인적으로 차지했다.
사원들이 땅을 모았다. 불교가 고려 사회의 중심이 되면서, 절들이 토지를 사들이고, 스스로 농민들을 부렸다.
권문세족들이 땅을 독점했다. 전쟁이 많아지고 혼란이 커지면서, 힘 있는 자들이 백성들의 땅을 빼앗았다.
국가는 세금을 걷지 못했다. 토지가 몇몇 세력에게 집중되자, 나라의 재정이 흔들렸다.
왕들은 이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강한 세력들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고려 후기로 갈수록 토지 제도는 무너져 갔다.

 

고려의 상업과 무역
고려는 단순한 농경 국가가 아니었다. 바다를 통해, 그리고 육로를 통해 많은 나라들과 무역을 했다. 개경의 시장은 언제나 붐볐고, 고려의 상인들은 바다를 건너 송나라와 교역을 했다.
개경, 서경, 동경의 경제 중심지
개경: 고려의 수도. 가장 큰 시장이 있었고, 수많은 상인들이 오갔다. 시전이라 불리는 상업 거리에서 다양한 물건들이 거래되었다.
서경: 북방의 물자가 모이는 곳. 여진과의 교역이 활발했고, 고려의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동경: 신라의 수도였던 곳. 고려가 통일하면서 행정 중심지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고려의 상업이 발달하면서 벼슬아치들뿐만 아니라 상인들도 부를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려의 상업을 완전히 자유롭게 풀어주지는 않았다.
관청이 직접 운영하는 상점이 많았다. 국가가 상업을 직접 통제하려 했기 때문이다.
소금, 철, 약재 같은 물품들은 정부의 관리 아래서 거래되었다.
그러나 고려 후반으로 갈수록, 사적인 상업 활동도 활발해졌다. 고려의 상업은 단순한 내부 교역이 아니었다. 대외 무역도 중요했다.

 

고려와 송나라의 무역 (대송무역)
송나라는 고려와의 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대상이었다.
고려는 송나라에 금, 은, 인삼, 종이, 먹, 모피를 수출했다.
송나라는 고려에 비단, 도자기, 향료, 서적을 보냈다.
송과의 무역이 활발했던 만큼, 고려에서는 송나라 화폐가 사용되기도 했다.

 

거란, 여진, 아라비아와의 교류
거란과의 무역: 고려는 거란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무역이 이루어졌다. 말, 가죽, 금속류 등이 오갔다.
여진과의 무역: 고려는 여진과도 교류했다. 여진은 고려에 말을 공급했고, 고려는 여진에게 농기구와 곡물을 주었다.
아라비아와의 교류: 고려에는 아라비아 상인들도 방문했다. 그들은 고려에서 인삼과 종이를 사 갔고, 고려에 향료와 유리 제품을 남겼다.
이처럼 고려는 농업뿐만 아니라 상업과 무역을 통해서도 경제를 성장시켜 나갔다.

 

고려의 농업과 수공업
농업은 고려 경제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단순한 농경이 아니라, 다양한 기술과 방법들이 사용되었다.
고려의 농업 발전과 우경 사용
우경이 보급되었다. 소를 이용한 농업이 이루어지면서 생산량이 증가했다.
윤작법이 시행되었다. 땅을 계속해서 경작하지 않고, 일정 기간 휴경지를 두어 땅을 보호했다.
농기구가 발달했다. 쟁기, 괭이 등의 철제 농기구가 널리 사용되었다.
농업이 발전하면서 고려의 식량 생산량이 늘어났고, 인구도 증가했다.
도자기, 금속 공예의 발달
고려의 공예는 매우 뛰어났다.
고려청자: 비취색을 띠는 아름다운 도자기. 송나라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금속 공예: 불교가 발달하면서 금속 불상, 불경을 새긴 금속 판 등이 많이 제작되었다.
고려의 장인들은 끊임없이 손을 움직이며 물건을 만들었다.

 

고려 경제의 흐름
고려는 단순한 농경 국가가 아니었다. 강력한 토지 제도를 통해 국력을 유지했고, 상업과 무역을 통해 세계와 교류했다. 그러나 토지 겸병이 심해지면서 양극화가 심해졌고, 경제적 불평등이 커졌다.
결국, 고려의 경제 체제는 새로운 변화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 변화는 고려가 아닌,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제5장 고려의 문화와 종교
고려의 땅은 불교의 나라였다. 절이 있었고, 스님들이 있었고, 사람들이 기도했다. 왕도 절에 가서 참배했고, 백성들은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았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배움이 있었고, 글이 있었으며, 지혜가 있었다. 유학이 들어왔고, 새로운 학문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고려는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도 지식을 쌓아갔다.
이 나라의 문화를 지켜낸 것은 군대가 아니었다. 무력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남긴 책과 건축,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생각이었다. 고려는 단순한 전쟁의 나라가 아니었다. 고려는 글과 예술, 사상의 나라였다.

 

고려의 불교 문화
고려의 하늘에는 언제나 불교가 있었다. 왕이 법회를 열었고, 귀족들은 불상을 세웠다. 농민들은 절을 찾아가 기도를 올렸다. 불교는 신앙이었고, 동시에 정치였다.
국교로서의 불교와 불교 사상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 왕들은 불교를 지지했다. 고려의 시조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불법을 받들어 나라를 다스려라.
불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려를 하나로 묶는 정신이었다. 전국 곳곳에 절이 세워졌고, 승려들은 고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러나 불교는 단순한 신앙의 형태로만 머물지 않았다. 고려 불교는 다양한 사상으로 발전했다.
천태종: 의천이 중심이 되어 융합적인 불교 사상을 전개했다.
조계종: 지눌이 주장한 선불교로, 실천을 강조했다.
불교는 고려를 움직이는 힘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고려를 흔들기도 했다.

 

팔만대장경 조성과 불교 건축
불교가 고려에서 절정을 이루던 때, 거대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몽골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 고려의 왕들은 부처에게 기도했다. 부처님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
팔만 개가 넘는 목판에 경전을 새겼다. 경전을 새길 때마다, 사람들은 기도했다. 이 글자가 새겨지는 순간, 고려가 무너지지 않기를.
팔만대장경은 단순한 경전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려의 신앙이었고, 고려의 희망이었다.
불교 건축도 발전했다. 개경에는 거대한 절이 있었고, 전국 곳곳에 아름다운 불탑이 세워졌다. 불교는 고려의 숨결과 같았다.
그러나 불교는 점점 변질되기 시작했다.
불교의 타락과 신진사대부의 비판
불교가 너무 강해졌다. 절이 너무 많아졌고, 승려들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가졌다. 귀족들은 불교를 이용해 땅을 차지했고, 백성들은 고통을 받았다.
신진사대부들은 불교를 비판했다.
불교는 부패했다.
나라를 바로 세우려면, 불교의 권력을 줄여야 한다.
결국, 고려가 무너져 갈 때, 불교도 함께 무너지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고려의 유교와 성리학
불교가 고려의 정신이었다면, 유교는 고려의 법과 정치였다.
고려의 유교 정치 이념
고려의 왕들은 유교를 배웠다. 유교는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었고, 왕이 신하를 다스리는 길이었다. 고려의 정치 체제는 유교적 원칙을 따랐다.
고려의 관료들은 유교 경전을 공부해야 했다. 과거 시험을 통과하려면 유교를 알아야 했다. 유교는 고려의 기본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이 되지는 않았다.

 

성리학의 도입과 신진사대부의 성장
고려 후반으로 가면서, 중국에서는 새로운 유교 사상이 등장했다. 그것이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단순한 유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철학이었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고려의 학자들은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안향이 그것을 처음 들여왔고, 정몽주 같은 학자들이 이를 발전시켰다.
성리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나라를 새롭게 하고 싶어했다. 그들은 고려의 부패한 체제를 바꾸고 싶어했다. 그리고 그들은 조선을 세우는 주역이 되었다.

 

고려의 과학과 예술
고려는 싸움의 나라가 아니었다. 고려는 문화의 나라였다. 고려 사람들은 글을 남겼고, 그림을 그렸으며, 예술을 발전시켰다.
고려청자와 금속 활자
고려하면 떠오르는 것은 고려청자였다. 비취색을 띠는 아름다운 도자기. 고려의 장인들은 불가마 앞에서 밤을 새우며 청자를 만들었다. 그들의 손끝에서 완벽한 곡선이 탄생했다.
그리고 고려는 세계 최초로 금속 활자를 만들었다. 인쇄술이 발전했고, 책이 널리 퍼졌다. 고려의 지식은 널리 퍼져나갔다.
문학과 역사 기록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는 역사를 기록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남겼다. 고려의 역사가 아니라, 신라와 고구려, 백제의 역사까지 남겼다.
그리고 일연은 삼국유사를 남겼다. 신화와 전설, 잊혀져 가던 이야기들을 기록했다. 고려는 단순히 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고려는 기억하는 나라였다.

 

제6장 고려의 쇠퇴와 개혁
고려의 나라는 오래된 나무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 뿌리는 썩어가고 있었다. 귀족들은 더 이상 나라를 위한 정치를 하지 않았다. 왕은 있었지만 힘이 없었고, 무인들은 칼을 들고 권력을 잡았다. 몽골의 말발굽이 고려 땅을 짓밟았고, 백성들은 절망 속에서 살아갔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변화는 일어났다. 고려를 다시 세우려는 이들이 있었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자들이 있었다.
고려는 그렇게 무너져 갔고, 또 다른 길을 찾아 나섰다.

 

무신정권과 문벌귀족의 몰락
고려의 왕들은 오랜 시간 귀족들의 힘에 눌려 있었다. 문벌귀족들은 권력을 나누어 가졌고, 높은 자리에는 자신들의 자식들만 앉혔다. 그러나 나라의 기운은 점점 쇠약해졌고, 불만은 쌓여갔다. 가장 힘든 일을 하는 자들은 보잘것없는 대접을 받았다. 무인들은 귀족들에게 무시당하며, 그들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왔다.
이의방, 정중부의 정변과 무신 정권
1170년, 무신들이 일어섰다. 왕이 있긴 했으나, 왕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의방과 정중부를 비롯한 무인들이 칼을 들었다. 문신들은 궁궐에서 무참히 살해당했다. 고려의 정치가 뒤집혔다.
무신들은 왕을 옹립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자신들이 가졌다. 이제 고려는 더 이상 귀족의 나라가 아니었다. 그러나 무신들은 왕이 되어본 적이 없었고, 정치를 해본 적도 없었다. 권력은 서로의 손을 떠돌았고, 배신과 암살이 계속되었다.
이의방은 반란을 주도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제거당했다.
정중부는 무신정권을 안정시키려 했으나, 결국 최후를 맞이했다.
경대승은 스스로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고려는 이제 무신들의 나라가 되었으나, 그것이 평화로운 시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최씨 정권과 도방의 운영
그러나 그런 혼란 속에서도 권력을 제대로 잡은 자가 있었다. 최충헌이었다.
그는 무신들의 싸움을 끝내고, 실질적인 독재 체제를 만들었다. 왕은 있었지만 허울뿐이었다. 고려의 왕권은 최충헌의 손 아래 있었고, 그는 고려를 다스리는 진짜 왕이었다.
그의 집안은 60년 동안 고려를 지배했다. 최씨 정권이었다.
최충헌은 도방이라는 군사 조직을 만들어 자신의 권력을 지켰다.
그의 아들 최우는 정방을 만들어 관리를 임명했다.
최씨 가문은 고려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마음대로 나라를 움직였다.
그러나 권력은 영원할 수 없었다.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면서 최씨 정권도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몽골 침략과 무신정권의 종말
몽골은 고려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고려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강화도로 천도하고, 몽골과 싸웠다. 고려의 왕들은 바다 건너 강화도에서 버텼고, 몽골군은 육지에서 고려를 불태웠다.
그러나 결국 고려는 몽골과 타협했다. 왕이 개경으로 돌아왔고, 고려는 몽골의 지배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의 무신정권도 흔들렸다. 최씨 정권은 무너졌고, 고려는 다시 왕이 다스리는 나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고려의 회복이 아니었다. 고려는 이제 몽골의 지배 아래 있었다.

 

고려 말 개혁과 왕권 강화
고려는 몽골의 간섭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왕은 허수아비였고, 고려는 고려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공민왕의 개혁 정치와 신돈
공민왕은 고려를 다시 고려답게 만들고 싶어했다. 그는 몽골풍을 없애고, 고려의 문화를 되살리려 했다. 원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그는 기회를 잡았다.
원나라의 옷을 입지 못하게 했다.
원나라에 바치던 공녀를 보내지 않겠다고 했다.
친원파 세력을 숙청했다.
그러나 왕 혼자서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었다. 공민왕은 자신의 개혁을 도와줄 사람을 찾았다. 그가 선택한 인물은 신돈이었다.
신돈은 불교 승려였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승려가 아니었다. 그는 개혁을 주장했고, 새로운 세상을 원했다.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했다.
권문세족들이 빼앗은 땅을 백성들에게 돌려주려 했다.
그러나 개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돈은 너무 많은 적을 만들었다. 결국, 그는 제거당했다. 공민왕도 더 이상 개혁을 추진할 힘을 잃어갔다. 고려는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전민변정도감 설치
전민변정도감은 고려 후기에 가장 중요한 개혁 기관이었다. 이 기관은 권문세족들이 강제로 빼앗은 토지를 조사하고, 그것을 백성들에게 돌려주는 역할을 했다. 신돈이 중심이 되어 운영했지만, 그가 사라진 후 개혁은 약해졌다.
그러나 이 개혁은 단순한 토지 개혁이 아니었다. 고려의 권력을 다시 왕이 가지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고려는 너무 오랫동안 무너져 있었다. 개혁은 한 걸음 나아가면 다시 뒤로 밀려났다.
신흥 무인 세력과 신진사대부의 등장
고려는 이제 새로운 세력을 필요로 했다. 오랫동안 나라를 지배했던 귀족과 무신들은 너무 많은 문제를 만들었다. 이 틈에서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다.
신흥 무인 세력: 최영, 이성계 같은 장군들이 나라를 지키면서도 점점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신진사대부: 유교를 공부하고, 개혁을 원했던 새로운 정치 세력.
고려는 다시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다.

 

고려의 마지막 순간
고려는 무너지고 있었다. 무신들이 권력을 잡았고, 몽골이 고려를 지배했다. 공민왕은 개혁을 하려 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새로운 힘이 자라나고 있었다.
무인들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이성계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이름을 알렸다. 신진사대부들은 유교 정치의 이상을 품고 새로운 나라를 꿈꾸고 있었다.
고려는 더 이상 고려일 수 없었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를 기다리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그러나 고려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고려는 끝까지 버텼고, 고려는 끝까지 싸웠다. 그러나 결국, 새로운 나라가 등장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고려는 사라졌지만, 고려가 남긴 정신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제7장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
고려의 역사는 긴 그림자처럼 이어졌다. 왕건이 세운 나라였고, 그 뒤를 이은 왕들이 다스렸다. 전쟁이 있었고, 평화가 있었으며, 반란이 있었고, 개혁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은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다. 왕조는 늙었고, 나라의 기운은 쇠약해졌다. 바람이 불었다. 고려의 깃발이 나부꼈고, 그 아래에서 역사는 새로운 길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려 왕조의 붕괴
고려의 마지막 세월은 혼란과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왕들은 더 이상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다. 귀족들은 서로 반목했고, 백성들은 고통 속에서 살았다.
우왕과 창왕의 실각
왕은 나라의 중심이어야 했다. 그러나 고려의 마지막 왕들은 중심이 아니었다. 그들은 누군가의 꼭두각시였고, 무력한 존재였다.
우왕은 어려서 왕이 되었다. 그러나 왕이 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신하들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 그를 지배하는 자는 최영이었다. 최영은 노련한 무장이었고, 전쟁에서 수많은 승리를 거둔 자였다. 그러나 그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왜구가 고려를 침략했다. 고려의 바다는 불길에 휩싸였고, 백성들은 도망쳤다. 최영은 칼을 들었다. 그는 말했다.
왜적을 몰아내야 한다.
그러나 나라의 혼란은 적이 쳐들어오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나라의 안에서도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창왕이 즉위했으나, 그 또한 오래갈 수 없었다. 권력은 더 이상 왕에게 있지 않았다. 고려는 왕이 아니라, 무인과 신진사대부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왜구의 침략과 고려의 혼란
고려의 마지막 시대를 뒤흔든 것은 단순한 정치 싸움만이 아니었다. 바다를 넘어온 왜구들이 고려를 약탈했다. 그들은 불을 질렀고, 사람들을 죽였다. 고려의 군대는 이들을 막기 위해 싸웠지만, 혼란 속에서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최영은 왜구를 몰아내려 했고, 백성들은 살아남기 위해 도망쳤다. 고려의 국토는 불길 속에서 흔들렸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큰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최영과 이성계의 대립
고려를 지키려는 자와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자.
최영은 고려를 지키려 했다. 그는 전통적인 문신과 귀족 세력을 등에 업고, 무너져가는 고려를 다시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시대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성계는 달랐다. 그는 전쟁터에서 자랐고, 군대를 움직일 줄 알았다. 그는 말 위에서 고려의 현실을 보았고, 그가 본 것은 한 가지였다. 고려는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최영은 왕을 등에 업었고, 이성계는 군대를 등에 업었다. 그 둘의 싸움은 결국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었다.

 

위화도 회군과 고려의 마지막 날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1388년)
1388년, 고려는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요동을 공격하려 했다. 그것은 최영이 주도한 일이었고, 왕의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을 무시한 결정이었다. 고려는 전쟁을 할 힘이 없었다. 나라의 백성들은 지쳐 있었고, 군대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성계는 이를 반대했다. 그는 말했다.
싸울 힘이 없는 나라가 전쟁을 하면, 그것은 패배를 자초하는 일이다.
그러나 최영과 왕은 듣지 않았다. 이성계는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왕의 뜻을 따를 생각이 없었다.
위화도에서 그는 결단을 내렸다.
이 싸움은 잘못된 싸움이다. 고려를 살릴 길은 따로 있다.
그는 군대를 돌렸다.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군사들과 함께 개경으로 향했다. 그것은 반역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새로운 시대를 여는 길이었다.
위화도 회군. 고려의 운명은 이 순간 결정되었다.

 

고려 왕조의 마지막 왕 공양왕
이성계는 군대를 이끌고 개경에 도착했다. 최영은 체포되었고, 결국 처형되었다. 고려의 마지막 희망은 무너졌다.
공양왕이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왕이 아니었다. 그는 단순한 허울이었다. 이성계는 왕을 내세웠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왕조의 유지가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고려는 더 이상 고려가 아니었다. 고려는 이름만 남아 있었고, 나라의 실권은 이성계와 그의 세력에게 넘어갔다.

 

조선 건국과 고려의 멸망 (1392년)
1392년. 고려의 역사는 끝을 맞이했다. 공양왕은 폐위되었고, 고려의 왕조는 막을 내렸다.
새로운 왕조가 세워졌다. 그 이름은 조선이었다.
이성계는 왕이 되었다. 그는 고려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았고, 이제 새로운 나라를 만들 준비를 했다. 고려는 500년을 이어왔지만, 결국 무너졌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고려의 시대는 갔다. 그러나 고려의 정신은 남았다. 조선은 고려의 역사 위에 세워졌고, 고려의 백성들은 조선의 백성이 되었다.
왕조는 바뀌었지만, 역사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바람은 또다시 불었다. 새로운 시대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