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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시간에 끝내는 대만사 이야기1,

 

1장. 서문 — 섬은 섬으로만 남지 않는다
아직 어둠이 덜 가신 새벽, 남쪽 항구에 서면 바람은 언제나 바다 쪽에서 밀려온다.
짙은 안개 속에서 선박의 윤곽이 아스라히 떠오르고, 철제 로프에 매달린 쇠고리가 차갑게 울린다. 항구 노동자들은 벌써 움직인다. 시간은 해안가 도시에서는 느리게 흘러가는 법이 없다.

 

이 섬은, 그렇게 언제나 밖으로 향하는 몸짓으로 깨어났다.
돌아볼수록 역사는 바다와 더불어 만들어졌다. 육지의 깊은 숲보다, 바다의 깊고 검푸른 저편이 더 많은 이야기를 실어왔다.

 

누군가는 대만을 ‘섬’이라 부른다. 그러나 섬은 결코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고립이라는 단어는 인간이 나중에 덧씌운 관념일 뿐, 이 작은 대지 위에는 늘 외부의 바람이 드나들었다. 항로는 언제나 열려 있었고, 어딘가에서 온 이들은 늘 이곳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다시 어딘가로 떠나갔다.

 

먼 옛날, 바람을 읽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별과 바다의 결을 따라 항해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오늘날에도 산지 깊숙한 곳, 원주민 촌락에서 들려오는 노래 속에 숨어 있다.
그 뒤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외부에서 온 더 크고 빠른 배들이 이 섬의 해안을 포위했고, 이름 모를 지도로 그려냈다. '포르모사'라 불리던 시절, 섬은 이미 다른 이의 언어로 명명된 땅이었다.

 

이곳은 한 번도 단일한 이야기로 포장된 적이 없다.
그렇다고 수많은 조각들이 온전히 드러난 적도 없다. 각 시대마다 이 섬은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고, 그때마다 이전의 이름은 지워졌다. 그러나 지워진 이름들이 사라지는 법은 없다. 기억은 토양 속에 남아 다시 피어난다.
그렇게 겹겹이 쌓인 기억 위에 오늘의 대만이 있다.

 

지도 위에서는 손쉽게 경계를 그을 수 있다. 남쪽은 가오슝, 북쪽은 타이베이, 동쪽은 깊은 산과 바다, 서쪽은 인파로 붐비는 도시.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속 경계는 그렇지 않다.
어떤 이는 스스로를 ‘중국인’이라 믿는다. 또 다른 이는 ‘대만인’이라는 말을 처음 듣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자신을 섬의 아이로만 여기며, 국가와 민족이라는 개념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

 

이곳의 역사는 바로 그런 질문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어야 하는가?"

 

대만은 작은 땅이지만, 그만큼 거대한 질문들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곳이다. 외부로부터의 질문, 내부로부터의 질문 — 그리고 그 사이에서 형성되는 정체성의 복잡한 결.

 

해방 후 어느 날, 한 노인은 시장 골목에서 외쳤다.
"중국은 대륙에 있다. 여긴 섬이다. 이 섬은, 우리 것이다."
그러나 바로 맞은편에서 한 젊은이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섬 따위가 아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국가의 후계다."

 

이 작은 대화 한 조각이, 수십 년 간 이어진 정치적·문화적 균열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섬이 불행한 기억의 공간으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빛나는 희망의 조각도 있다. 민주주의는 압제의 어둠을 뚫고 피어났다. 청년들은 거리로 나가 새로운 구호를 외쳤다. 언어도 바뀌었다. 한때 금지된 모어(母語)들이 다시 노래가 되어 퍼졌다.
그러나 바로 그때, 또 다른 목소리는 경계한다. 너무 빠른 변화가 또 다른 분열을 낳을 것이라고.

 

그렇다면 대만은 어디로 가는가?
국제정치의 무대 위에서 대만은 늘 ‘문제적 존재’로 간주된다. 하나의 중국인가, 독립국가인가. 전략적 요충지인가, 자율적 공동체인가.
그러나 대만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보다 더 근본적이다.
"우리는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
"우리의 삶은 어느 시간대에 속하는가?"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대만에서는 언제나 현재에 침투해 있는 살아 있는 시간이다.
바닷가의 오래된 벽돌 건물에서, 노래방 골목의 싸구려 간판에서, 원주민 축제에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 시간은 균열 속을 비집고 흐른다.

 

이 글은 바로 그 흐름을 좇아가는 여정이다.
연대기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기억의 층위를 따라 걷는 길.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묻고 또 물을 것이다.
섬은 섬으로만 남을 수 있는가?
그리고, 만약 아니라면 그 다음은 무엇인가?

 

이제, 바람이 다시 섬 쪽으로 분다.
이야기를 시작할 시간이다.

 

2장. 선사시대와 원주민 — 바다에서 온 첫 목소리
바람은 언제나 바다에서 먼저 불어왔다. 육지의 숲은 조용했지만, 파도는 쉼 없이 해안을 두드렸다.
수천 년 전, 아직 이름조차 붙여지지 않은 이 섬의 해안에 작은 카누들이 처음 도착했을 때도 그랬다.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남쪽이었다. 인도네시아 군도 너머의 먼 섬들, 바람과 조류, 별빛의 지도를 따라 이동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 노래, 신화, 농경 기술, 항해술을 짊어지고 왔다.
대만은 단지 한 곳의 종착지가 아니었다. 오스트로네시아 디아스포라라는 거대한 흐름 속의 하나의 교차점이었다.

 

처음 도착한 사람들은 해안가에 터를 잡았다.
그들은 어업과 채집, 작은 농경을 시작했다. 산지로 들어가 숲의 생명과 교감했고, 하천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었다.
오늘날 타이완 전역에 흩어져 있는 고대 유적들 — 탑카엔 문화(約7000년 전), 다펜커 문화(約4000년 전) — 는 그 흔적이다.

 

그들은 언어로, 노래로, 의식으로 세상을 해석했다.
그들의 세계관에는 땅과 하늘,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가 없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신화에 따르면, 섬의 높은 산은 거대한 신의 잠든 형상이었고, 바다는 조상의 숨결이 머무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 섬은 그들에게만 속해 있지 않았다.
바다는 새로운 이들을 계속 불러들였다. 고대 중국 남부에서 온 교역자들이, 때로는 바닷길을 건너 원주민들과 접촉했다. 최초의 교류는 교역과 사소한 문화적 교환에서 시작되었지만, 점차 토착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더 거센 물결로 이어졌다.

 

이 시대의 대만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숲이 섬을 뒤덮고 있었고, 사슴과 멧돼지가 들판을 누비고, 강에는 은빛 물고기가 넘쳤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존재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로 자연은 때때로 인간에게 가혹했다.
태풍은 마을을 쓸어버리고, 해일은 해안을 침식시켰으며, 화산은 때때로 불을 뿜었다.
그럴 때마다 원주민들은 노래를 부르며 땅을 달래고, 신들에게 안식을 청했다.

 

고대 사회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각 부족마다 고유한 정치적 구조, 종교 체계, 예술 전통이 존재했다.
카바란족은 정교한 도자기 문화를 발전시켰고, 아타얄족은 얼굴 문신으로 성인식을 치렀다. 브루카이족은 복잡한 곡예적 춤으로 신을 기리는 의식을 치렀다.

 

중요한 것은, 이 시대에도 대만은 고립된 섬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학자들은 대만이 오스트로네시아어족 확산의 핵심 경유지였다고 본다.
이 섬에서 다시 배를 띄운 이들은 필리핀으로, 태평양의 더 먼 섬들로 향했다.
이 흐름은 수천 년 동안 이어졌고, 결국 태평양 전역의 문화적 DNA 속에 대만의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원주민의 세계는 영원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한족 이주가 본격화되기 시작했고, 외부의 종교·경제·정치적 압력이 점차 이 고요한 사회들을 뒤흔들었다.
그 결과 언어의 침식, 토지의 상실, 문화적 억압이라는 고통의 서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늘날 대만 곳곳에서 원주민의 언어는 되살아나고 있으며, 축제와 의식이 다시 사회적 의의를 회복하고 있다.
한 할머니가 말했다.
"우리가 노래하는 것은 옛 조상들의 숨결을 잇는 것이다. 바람은 잊지 않는다."

 

그렇다. 바람은 잊지 않는다.
섬의 첫 목소리는 여전히 바람을 타고 흐른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앞으로의 이야기 속에서도 계속 우리를 따라올 것이다.

 

3장. 유럽 열강과 초기 식민지 — 포르모사라는 이름의 명암
그들은 그 섬을 처음 보고 숨을 삼켰다.
어느 해, 1590년경, 포르투갈 선원들은 아득한 해상에서 솟아오른 초록빛 대지에 다가가며 이렇게 외쳤다.
"Ilha Formosa!"
아름다운 섬.

 

그 외침은 우연처럼 기록되었으나, 그 뒤로 대만은 더 이상 무명의 섬이 아니었다.
지도 위에 찍힌 이름 하나가 섬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 역사는 늘 그렇게 시작된다.

 

포르투갈은 그 섬에 영토적 야욕을 품을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아프리카와 인도, 동남아에 뻗친 교역망을 관리하는 데 급급했다. 그러나 그 이름이 다른 유럽 열강들에게 매혹의 씨앗이 되었다.

 

17세기 초, 유럽은 아시아 바다에서 새로운 무대를 찾고 있었다. 향신료, 비단, 도자기 — 그리고 무역로를 둘러싼 통제권.
중국과 일본 사이의 전략적 위치에 놓인 대만은 점점 더 유럽 상인들의 시야에 깊숙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624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대만 남부 타이난 인근의 펑후 제도를 점령하려다 명나라 해군의 저지에 부딪혔다.
그들은 방향을 바꿨고, 대만 본섬의 남단에 요새를 세웠다. 이름하여 젤란디아 성.
이것이 바로 대만 최초의 본격적 식민 통치의 시작이었다.

 

네덜란드인들에게 대만은 군사 거점이자 경제적 중계지였다.
그들은 유럽과 일본, 동남아를 잇는 삼각 교역의 중간 허브로서 대만을 활용했다.
그 와중에 한족 이민자들도 대거 섬으로 흘러들었다. 명말의 혼란을 피해 바다를 건넌 이들은 새로운 삶의 기회를 찾아 숲과 늪지대를 개간했다.

 

이 시기, 대만은 진정한 다중 문화적 공간이었다.
네덜란드 상관과 군인들, 한족 이주민들, 원주민 부족들, 일본 상인들까지.
모두가 서로 다른 언어, 다른 욕망으로 섬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권력의 논리는 언제나 냉혹하다.
네덜란드 통치는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방향으로만 설계되었다. 원주민들은 과세와 노동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했고, 거부하는 부족은 군사적 탄압을 받았다. 일부 원주민 사회는 유럽식 학교 교육과 기독교 선교의 영향을 받으며 점차 문화적 변화에 노출되었다.

 

한편 북쪽에서는 또 다른 깃발이 펄럭였다.
1626년, 스페인도 북부 대만(오늘날의 기룽과 담수 지역)에 진출했다.
그들은 필리핀 마닐라를 중심으로 가톨릭 선교 네트워크를 확장하려 했다. 북부에는 산토도밍고 성채가 세워졌고, 스페인과 네덜란드는 섬을 둘러싸고 경쟁에 돌입했다.

 

이 경쟁은 오래가지 못했다.
1642년, 네덜란드군은 스페인 북부 거점을 무력으로 탈환했고, 이후 약 20년 동안 대만은 사실상 네덜란드의 독점적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그 시기 섬의 경제는 빠르게 재편되었다.
사탕수수와 쌀 재배가 본격화되었고, 일본과 동남아, 유럽을 잇는 교역로에서 대만산 농산물과 삼림 자원이 주요 품목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원주민 사회의 붕괴, 노예 노동의 증가,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한족 이주민들도 곧 네덜란드 당국과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세금과 강제 노역, 교역 통제는 한족 사회 내에서 불만을 키웠고, 무장 저항도 몇 차례 발생했다.

 

그러던 중, 중국 대륙에서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명나라의 몰락과 청조의 부상.
격변의 와중에 한 인물이 역사에 등장한다 — 정성공(鄭成功).

 

정성공은 명나라 충신으로서 청조에 항거하며 대만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대만을 ‘반청 복명(反清復明)’ 운동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그렇게 1661년, 대만 남부 해안에 정성공의 대규모 함대가 상륙했다.
젤란디아 성은 9개월간의 포위전 끝에 함락되었고, 네덜란드 세력은 섬에서 철수했다.
한 시대가 끝나고, 또 다른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대만이 외부의 상상과 투사 속에서 처음으로 역사적 무대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포르모사’라는 이름은 오래갔지만, 그 이름 아래에서 벌어진 이야기는 아름다움보다는 욕망과 투쟁, 억압과 저항의 이야기였다.

 

섬은 이제 단순한 경유지가 아니었다.
제국적 욕망의 전장이자, 새로운 주체들이 탄생할 무대로 변모한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끝이 아니었다.
그 다음으로 다가오는 것은 더 거대한 파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