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노르만의 정복 – 혈통이 아닌 체계의 승리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윌리엄이 승리한 것은 단순한 전투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제도와 질서, 기록과 언어라는 거대한 물결이 브리튼을 덮친 순간이었다. 역사상 많은 전쟁이 왕조를 바꾸었지만, 이 정복은 더 근본적인 것을 바꾸었다. 바로 나라가 사람의 것이 아닌 시스템의 것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윌리엄은 단지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군인이 아니었다. 그는 중세 유럽에서 가장 정교한 봉건제도와 행정 체계를 몸에 익힌 관리자였다. 그가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한 근거는 혈통이었다. 그러나 그가 지배를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철저한 통치 기획에 있었다. 윌리엄은 왕이 된 이후, 잉글랜드 전역을 대상으로 역사상 최초의 전국 토지 조사인 ‘둠스데이 북’을 제작한다.
이 조사는 단순한 세금 장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땅이 누구의 소유인지, 얼마나 되는지, 그 땅에 사는 자들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문서화한 최초의 중앙 권력의 시도였다. 말하자면, 이때부터 잉글랜드는 땅보다 문서를 통해 다스려지기 시작했다. 무력의 시대에서 행정의 시대로 넘어가는 징조였다.
흥미롭게도, 윌리엄이 이끈 노르만 정복은 왕만 바꾼 것이 아니라, 귀족과 교회, 사법과 군사까지 전면 교체한 종합 리셋이었다. 앵글로색슨 귀족 대부분은 축출되었고, 그 자리는 노르망디 출신의 기사들이 차지했다. 이들은 단지 땅을 받은 수혜자가 아니라,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봉신이었다. 그리고 이 계약 관계는 종이 위에 서명된 것이 아니라, 피로 각인되었다.
이 시점에서 잉글랜드는 국가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더 이상 단순한 족장 연합체가 아니라, 정복자에 의해 관리되는 하나의 행정 단위로 정리된 것이다. 법은 말이 아니라 기록으로 남겨졌고, 귀족은 혈통보다 계약과 의무로 서열이 정해졌다. 이것이 바로 혈통이 아닌 체계의 승리였다.
그렇다면 노르만 왕조는 잉글랜드를 '지배한 것'일까, 아니면 '다시 만든 것'일까? 실제로 이후 수백 년 동안 왕실 언어는 프랑스어였고, 법정 언어도 라틴어였다. 심지어 오늘날 영어 속 법률 용어 대부분이 이 시기에서 비롯됐다. evidence, court, justice 같은 단어는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문화적 이식이었다.
그러나 노르만의 승리는 전면적 동화라기보다는 ‘덮어쓰기’에 가까웠다. 기존의 앵글로색슨 문화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하수처럼 아래에서 흐르며 살아남았다. 평민은 여전히 영어를 썼고, 마을과 교회는 여전히 옛 전통을 유지했다. 이는 잉글랜드의 이중성을 형성한다. 권력은 프랑스어를 말하지만, 대지는 영어로 숨 쉬었다.
이후 윌리엄의 후계자들은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속적인 법률 정비와 문서화를 추진한다. 헨리 1세와 헨리 2세에 이르러서는 오늘날 영국 법의 모태인 ‘보통법’ 체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 법은 로마법이나 교회법처럼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판례를 통해 아래에서 쌓여 올라간 법이었다. 말하자면 법은 종이가 아니라 습관에서 만들어졌고, 이것이 잉글랜드 특유의 실용성과 연결된다.
역사는 때로 단절이 아니라 이어짐을 가장한 전환이다. 노르만 정복은 외부의 피가 내부의 심장을 갈아 끼운 사건이었지만, 그 안에서 숨쉬는 리듬은 앵글로색슨의 것과 연결되어 있었다. 왕조는 바뀌었지만, 농부의 밥상과 성당의 종소리는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건, 누가 나라를 지배하느냐가 아니라, 그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기록되고 운영되느냐는 점이다. 윌리엄은 검으로 잉글랜드를 얻었지만, 둠스데이 북으로 그 땅을 소유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잉글랜드는 사람보다 체계가 더 오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제5장. 마그나 카르타 – 왕이 법 아래에 선 날
1215년, 런던 서쪽 템스 강가에 위치한 런이미드 평원에 한 무리의 귀족과 한 왕이 마주 앉았다. 칼을 꺾은 회담은 언제나 불편한 진실을 담는다. 그날, 잉글랜드 왕 존은 자신이 더 이상 ‘절대자’가 아니라는 문서에 서명하게 된다. 그 문서는 마그나 카르타였다. 하지만 당시 누구도 그것이 훗날 ‘헌법’이라는 개념의 기초가 될 줄은 몰랐다.
존 왕은 실패한 군주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영토를 잃었고, 교황과 충돌했으며, 잉글랜드 귀족들과도 신뢰를 잃었다. 그가 가진 권력은 법이 아닌 공포에서 나왔다. 그는 세금을 마음대로 걷었고, 영지를 몰수했으며, 반대자를 투옥했다. 중세의 왕은 신이 선택한 존재였고, 백성은 신의 섭리에 복종하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신의 이름으로 왕이 저지른 모든 것이 점점 참기 어려워졌다는 데 있었다.
마그나 카르타는 바로 이 위기의 결과였다. 문서라기보다는 저항의 산물이었다. 왕은 귀족들과의 전면전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서명했지만, 그 문서의 내용은 놀랍도록 현대적이었다. “그 누구도 적법한 재판 없이 체포되거나 투옥되지 않는다.” “세금은 귀족들의 동의 없이는 부과될 수 없다.” “왕도 법 아래에 있다.” 이것은 단순한 귀족 특권 보장이 아니라, 지배의 조건을 계약으로 규정한 선언이었다.
이때부터 권력은 더 이상 신의 선물이나 피의 계승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장과 도장, 증인의 서명으로 유지되는 구조가 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정치는 인간의 기억이 아닌 기록 위에 세워지는 체계로 진화했다. 권력을 감시하는 것은 더 이상 신의 응징이 아니라, 인간의 합의였다.
흥미롭게도, 마그나 카르타는 곧 폐기된다. 왕은 교황과 손잡고 이를 무효화했고, 곧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문서의 실패가 아니라, 아이디어의 성공이었다. 마그나 카르타는 잉글랜드 정치의 유령처럼 떠돌았고, 다음 세대의 왕과 의회, 법률가들은 그 유령을 점점 실체로 만들기 시작했다.
14세기, 의회는 점점 왕의 권력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진화했고, ‘동의 없는 과세 금지’는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이 문서는 미국 독립 선언과 프랑스 인권 선언, 심지어 유엔 헌장에까지 영감을 주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그나 카르타가 누구를 위한 문서였느냐가 아니다. 처음엔 귀족들의 이익 보호였지만, 그 형식과 언어는 다른 시대, 다른 계급에 의해 해석되고 확장되었다. 역사는 종종 의도되지 않은 결과로 진화한다. 왕의 약점을 틈탄 협상문서 하나가, 훗날 수많은 인간의 권리를 지탱하는 토대가 되었다.
마그나 카르타는 인간이 법을 만드는 존재라는 자각의 시작이었다. 자연이나 신이 아닌, 인간의 합의와 계약이 질서의 기반이 된다는 인식. 그리고 이 인식은, 왕의 권위를 바닥에서부터 다시 쓰게 만들었다.
문서 하나가 역사를 바꾼 것이 아니다.
문서를 만들 수 있다고 믿은 인간의 상상력, 그리고 그 문서를 끝내 존중한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이, 오늘의 자유와 권리를 만든 것이다.
제6장. 흑사병과 튜더 왕조의 등장 – 죽음이 바꾼 정치와 종교
14세기 중반, 잉글랜드는 죽음과 맞닥뜨렸다. 흑사병, 혹은 ‘검은 죽음’이라 불린 이 역병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 구조를 뒤흔드는 지각변동이었고,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에 의문을 던지는 폭풍이었다. 1348년부터 시작된 이 전염병은 단 2년 만에 전체 인구의 절반가량을 휩쓸었다. 말하자면, 살아남은 자들은 더 이상 예전의 사람이 아니었다.
수도원은 침묵했고, 의사들은 도망쳤으며, 사제들조차 장례를 포기했다. 신이 인간을 버렸다는 믿음이 퍼졌고, 인간 역시 신을 버리기 시작했다. 도시의 거리엔 사체가 나뒹굴었고, 밭은 경작되지 않았으며, 땅을 경작할 농민조차 모자랐다. 이것이야말로 전염병이 사회를 바꾼 방식이었다. 피지배 계층의 죽음은 지배 계층의 권력을 붕괴시켰고, 생존자는 처음으로 선택을 가지게 되었다.
봉건제의 기반이던 농노 제도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땅은 남았지만 사람이 부족했다. 영주는 더 이상 명령할 수 없었다. 그는 이제 ‘설득’해야 했고, 임금을 올려야 했다. 도시로 몰려든 농민들은 새로운 계층이 되었고, 수공업과 상업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죽음은 인간에게 협상의 권리를 주었고, 교회가 놓친 공간을 시장이 메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흑사병이 곧장 민주주의를 낳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신의 뜻’이라는 포장을 벗기 시작한 계기였다. 누가 살아남는가, 누가 통제하는가, 누가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감각이 바뀌었다. 이 감각은 몇 세대 뒤, 튜더 왕조의 등장을 통해 정치 체제까지 바꾸어놓는다.
15세기 말, 랭커스터와 요크 가문의 내전인 ‘장미 전쟁’이 이어지며 왕조는 혼란에 빠진다. 그러나 이 혼란의 끝에서 한 남자가 등장한다. 헨리 튜더, 후에 헨리 7세로 불리는 그는 요크 가문의 마지막 왕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연다. 그는 왕위의 정통성보다, 평화를 통한 질서를 중시했다. 튜더 왕조는 잉글랜드에서 중세와 근대를 잇는 다리였다.
헨리 7세의 치세는 의심보다 회복에 초점을 맞췄다. 중앙집권을 강화했고, 법과 세제를 재정비했으며, 귀족의 사병을 억제해 왕권의 독점을 꾀했다. 이는 결국 헨리 8세의 급진적인 종교개혁으로 이어진다. 왕은 더 이상 로마 교황의 권위를 따르지 않았고, 자신의 결혼과 이혼 문제를 스스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 결정은 곧 ‘잉글랜드 성공회’라는 새로운 종교 체계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튜더 왕조는 왕권이 신이 아닌 인간의 의지에 따라 행사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도화한 시대였다. 이전의 왕이 ‘신의 대리인’이었다면, 튜더의 왕은 ‘국가의 설계자’였다. 그는 믿음을 명령했고, 종교를 재편했으며, 자신을 교회의 수장으로 선언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종교개혁이 ‘신념의 전쟁’이기 이전에, ‘권력의 재배분’이었다는 점이다. 흑사병은 신에 대한 의심을 심었고, 튜더는 그 공백을 권력으로 채웠다. 이것이 바로 죽음이 만든 새로운 삶의 형태였다.
교회와 왕, 신과 인간, 전통과 체계의 경계가 무너진 시대.
그 시작은 바이러스 하나였고, 그 끝은 인간이 스스로 권위를 재조립하는 사건이었다.
제7장. 엘리자베스 1세와 제국의 시작 – 바다에서 태어난 영국
바다는 늘 두 가지 얼굴을 가졌다. 때로는 생존을 위한 통로였고, 때로는 침략의 문이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잉글랜드는 그 바다를 ‘국가의 운명’으로 재정의했다. 그리고 그 중심엔 한 여왕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 그녀는 단지 여왕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설계자였다.
그녀의 시대, 잉글랜드는 아직 유럽의 주변국에 불과했다. 육지에서의 영향력은 미약했고, 종교 갈등은 내부를 뒤흔들고 있었다. 스페인은 신대륙의 금과 교황의 축복을 등에 업고 전 세계를 누비고 있었고, 프랑스는 여전히 유럽 대륙의 패권을 두고 싸움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잉글랜드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은 바로 바다였다. 육지의 전쟁에서는 지는 나라였지만, 바다에선 아직 누구도 그들을 막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무역과 해적질 사이의 경계를 전략으로 삼았다. 프랜시스 드레이크 같은 해적은 왕의 이름으로 스페인의 금을 약탈했고, 그 수익은 잉글랜드의 해군력을 키우는 데 쓰였다. 이는 단순한 도둑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의 씨앗이었다. 바다는 더 이상 자연이 아니라, 영토였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약탈은 국가의 확장이었고, 이익은 정당한 전리품이었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그 함대는 기상과 전략, 그리고 잉글랜드의 해군력 앞에 무릎 꿇었다. 이 전쟁의 승리는 단지 전투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잉글랜드가 바다를 지배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사건이었다. 제국의 첫 문장은 이때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진정한 업적은 바다를 넘는 것이 아니라, 바다를 상상하게 한 데 있었다. 그녀는 국민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했다. 잉글랜드인은 더 이상 내륙의 농부나 성의 기사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항해자였고, 상인이었으며, 탐험가였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성은 점점 ‘영국인’이라는 단어로 수렴되기 시작했다.
문자와 신앙, 무역과 전쟁이 한 몸이 되어 떠다니는 이 거대한 해양국가의 시작은, 군사력이 아닌 상상력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그 상상의 여왕이었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을 ‘나라 그 자체’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몸은 여성일 수 있었지만, 그녀의 권력은 남성도, 교황도, 귀족도 아닌, ‘국민’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시기의 잉글랜드는 첫 식민지를 북미에 세우고, 동인도회사를 창설하며 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그것은 ‘제국’이라기보다 ‘가능성’에 가까웠다. 엘리자베스는 단지 씨를 뿌렸을 뿐이다. 그 씨는 몇 세기 뒤에야 진정한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꽃피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모든 변화가 내부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종교적 분열은 계속되었고, 빈곤은 확산되었으며, 왕권과 의회 간의 긴장은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늘 그런 방식으로 전진한다. 갈등을 제거하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짊어진 채 더 넓은 세계로 밀고 나아가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죽었다. 그러나 그녀가 설계한 정체성은 살아남았다. 영국은 이제 더 이상 육지의 작은 나라가 아니라, 바다를 지배하는 나라로 자리매김했다. 제국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의식의 지형이 되었고, 그 지형의 지도는 이 시대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국경은 펜으로 바뀌고, 전쟁은 돛으로 옮겨갔다.
바다는 더 이상 위험이 아니라, 기회였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그 기회의 문을 연, 최초의 해양 군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