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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시간에 끝내는 캄보디아사 이야기1

 

1장. 문명의 강 위에 태어난 신의 나라

모든 문명에는 한 줄기의 물이 있다.
그 물은 단순한 강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믿는 방식의 근원이 된다.
캄보디아의 문명도 그러했다.
메콩강은 단지 농업의 젖줄이 아니라, 신과 인간이 타협한 경계선이었다.
사람들은 강이 범람할 때 신의 숨결을 느꼈고, 강이 마를 때 인간의 죄를 떠올렸다.
문명은 늘 신의 뜻을 해석하는 인간의 집착에서 시작된다.

 

약 2천 년 전, 이 강의 주변에서 소규모 공동체들이 모여 살았다.
그들은 별다른 왕도, 신전도 없이 물과 흙, 햇살을 나누며 생존했다.
그러나 생존이 안정되면 인간은 곧 ‘의미’를 원한다.
그 의미를 가장 빠르게 제공해주는 것은 ‘보이지 않는 권위’,
즉 신이었다.
신을 믿기 시작한 순간, 인간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설명 가능한 존재’가 되었다.
이것이 문명의 시작이었다.

 

초기의 캄보디아 왕들은 신이 아닌 인간이었지만,
신의 언어를 독점하면서 신이 되었다.
그들은 강의 물결을 다스릴 수 없었지만,
그 물결을 ‘의식’으로 다스리는 척할 수 있었다.
홍수와 가뭄이 반복될 때, 백성들은 자연을 탓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이 노했다”고 말했고, 그 신은 곧 왕이었다.
왕권은 신앙 위에 세워지고, 신앙은 공포 위에 유지됐다.

 

불교와 힌두교의 경계가 모호했던 시기,
캄보디아 사람들은 신의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 돌 하나하나에는 두려움이 새겨졌다.
하늘의 뜻을 땅 위에 복제하려는 인간의 오만이
이때부터 건축의 형태로 드러났다.
거대한 사원과 조각상은 단지 종교의 상징이 아니라,
인간이 ‘죽음을 관리하려는 욕망’의 표현이었다.
신을 섬긴다는 것은 곧, 두려움을 통제하려는 행위였다.

 

하지만 역사는 언제나 역설적이다.
신을 가장 열렬히 믿은 사회일수록,
그 신은 점점 인간의 형태를 닮아간다.
왕은 신이 되었다가, 신은 다시 인간으로 추락한다.
캄보디아의 초기 문명에서 왕권은 신성을 가장했지만
그 속에는 피로 얼룩진 정치의 냄새가 짙었다.
제사를 지내고, 사원을 세우고, 신을 찬양하면서
그들은 동시에 신을 ‘이용’했다.
신은 인간의 구원을 약속했지만,
왕은 그 약속을 세금으로 환산했다.

 

문명은 단순히 돌로 쌓는 것이 아니다.
문명은 믿음으로 쌓인다.
그리고 믿음은 언제나 대가를 요구한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곧, 그 신이 만든 질서에 복종한다는 뜻이었다.
그 질서가 무너질 때, 인간은 혼란을 느끼고,
새로운 신을 찾아 떠난다.
이 반복되는 순환이 바로 인류사의 숨결이다.
캄보디아의 역사는 이 순환의 대표적인 무대였다.

 

메콩의 물줄기는 여전히 흐르고 있다.
그러나 그 위에 쌓인 문명들은 수없이 무너졌다.
사람들은 여전히 신을 믿지만, 그 신의 얼굴은 바뀌었다.
어느 날은 힌두의 신이었고,
어느 날은 부처였으며,
지금은 경제 성장과 관광이라는 새로운 신이 되었다.
신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인간의 욕망은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다.

 

결국 문명은 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을 발명한 인간의 이야기다.
캄보디아의 시작은 신의 축복이 아니라,
두려움과 욕망을 관리하려는 인간의 실험이었다.
그 실험은 돌로 남았고, 그 돌은 지금도 햇살을 받으며 말이 없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묻는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는가,
아니면 인간이 신을 필요로 했는가?”

 

2장. 앙코르 제국, 인간이 신을 모방한 순간

인간은 신을 닮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순수한 시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신의 권능을 재현하려는 교만이었다.
앙코르 제국의 탄생은 바로 그 교만의 결정체였다.
신처럼 영원하고, 신처럼 완벽하며, 신처럼 모든 것을 지배하고 싶었던 인간의 욕망이
거대한 사원의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앙코르와트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신의 세계를 흉내 낸 최초의 거대한 실험이었다.
하늘의 별자리를 본떠 설계된 중심축,
우주의 바다를 상징하는 해자,
그리고 신의 산 메루를 재현한 중앙탑.
모든 것은 신화의 지도를 따라 세워졌지만,
그 지도 위에서 피를 흘린 것은 인간이었다.

 

사람들은 신의 집을 짓는 일을 ‘복된 노동’이라 불렀지만,
실상은 수만 명의 손과 등에서 떨어지는 피와 땀으로 완성된 제국의 제단이었다.
돌 하나하나를 쌓을 때마다
인간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우리는 신을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신의 이름으로 인간을 섬기고 있는가?”

 

앙코르 제국의 왕들은 ‘데바라자(Devaraja)’, 즉 ‘신왕’이라 불렸다.
그들은 신의 화신이라 주장하며
자신의 이름을 사원에 새겼다.
신의 이름과 왕의 이름이 구분되지 않던 시대.
그것은 믿음의 절정이었지만, 동시에 이성의 붕괴였다.
사람들은 신을 사랑했지만, 그 신이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신의 이름으로 왕이 불멸을 얻었을 때,
백성은 침묵 속에서 인간의 유한함을 깨달았다.

 

앙코르의 영광은 흙으로 쌓은 탑처럼 위태로웠다.
왕은 자신을 신으로 세우기 위해
더 큰 사원, 더 넓은 수로, 더 많은 인력을 요구했다.
그러나 신의 왕국은 인간의 몸 위에 세워졌다.
노동과 세금, 전쟁과 굶주림이 반복될수록
신의 이름은 점점 공허해졌다.
그 웅장한 문명은 인간의 피로 쓰인 서사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앙코르의 몰락은 신의 저주가 아니라
신이 부재한 ‘인간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도시가 너무 거대해졌고,
물길은 제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졌다.
왕들이 신의 자리를 차지한 순간,
그들은 신처럼 책임을 질 수 없었다.
가뭄과 전염병, 내전이 덮쳤을 때
백성들은 신을 찾았지만, 신은 이미 사원의 돌벽 속에 갇혀 있었다.

 

문명은 신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사라질 때 비로소 드러난다.
앙코르의 폐허는 그 증거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 돌벽 앞에서 경외감을 느끼지만,
그 돌의 균열 속에는 한 가지 진실이 새겨져 있다.
‘신을 모방한 인간은 결국 자기 자신을 무너뜨린다.’

 

앙코르 제국은 위대한 신의 왕국이었지만,
그 신은 인간이 만든 환상이었다.
그들은 신을 향한 믿음으로 문명을 세웠지만,
결국 그 믿음이 인간의 자유를 삼켜버렸다.
신을 흉내 내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신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앙코르와트는 여전히 태양 아래 빛난다.
그러나 그 빛은 찬란함이 아니라, 질문의 빛이다.
“신이 인간을 닮게 만든 것일까,
아니면 인간이 신을 닮게 만든 것일까?”
그 물음은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사원의 그림자 속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3장. 돌의 왕국에서 진흙의 나라로

모든 제국은 영원을 꿈꾼다.
그러나 영원은 인간이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운 단어다.
앙코르 제국이 무너졌을 때,
사람들은 신의 침묵을 탓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신을 잊었다.

 

앙코르의 거대한 사원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돌은 무너지지 않았고, 신의 조각상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돌을 바라보던 인간의 마음이 변했다.
한때 신의 목소리가 들리던 제단 위에는
이제 잡초가 자라고, 원숭이들이 뛰놀았다.
신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인간은 잊음으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존재다.
기억이 너무 무거워지면, 문명은 스스로 그것을 내려놓는다.
앙코르의 붕괴는 외세의 침략이나 자연재해보다
더 근원적인 인간의 본능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의 나를 살리기 위해 과거의 나를 지워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생존 방식이었다.

 

사원은 더 이상 신의 집이 아니라, 돌의 무덤이 되었다.
사람들은 제단에 기도하지 않았고,
왕은 신의 언어 대신 현실의 언어로 통치하려 했다.
그때부터 캄보디아는 돌에서 진흙으로,
영원에서 일상으로,
신의 왕국에서 인간의 나라로 내려왔다.

 

한때 ‘데바라자’라 불리던 왕은 더 이상 신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사람들 사이의 조정자,
물길과 논밭을 관리하는 현실의 관리자였다.
신이 없는 왕국에서 왕은 피로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강을 따라 농사를 지었고,
신전 대신 마을을 세웠다.
문명은 여전히 살아 있었지만,
그것은 더 이상 ‘영원’을 꿈꾸지 않았다.

 

인류는 신을 버릴 수 없다.
그러나 신의 형상을 버릴 수는 있다.
앙코르 이후의 캄보디아는 신앙을 바꾼 것이 아니라,
신앙의 ‘형태’를 바꿨다.
돌로 쌓은 신 대신, 마음속의 신을 믿기 시작했다.
불교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것도 이 시기였다.
부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는 인간이었다.
앙코르의 돌이 신의 권능을 상징했다면,
이제 사람들은 부처의 침묵 속에서
인간의 연약함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러니는 여기서 또 피어난다.
신을 버린 인간은 다시 신의 자리를 필요로 한다.
불교는 곧 또 다른 제도와 권력의 형식으로 굳어졌다.
사찰은 왕의 이름으로 세워졌고,
왕은 다시 신의 대리인이 되었다.
문명은 형태를 바꾸었을 뿐,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인간은 여전히 두려웠고,
그 두려움을 다스릴 무언가가 필요했다.

 

앙코르의 돌이 부서진 자리에 진흙의 사원이 세워졌다.
그 진흙은 불안정했고, 쉽게 무너졌다.
그러나 그 위에 세워진 인간의 삶은
돌보다 따뜻했고, 현실적이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하늘의 왕을 섬기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섬기며, 작은 공동체 속에서 평화를 찾았다.
이것이 앙코르의 몰락 이후,
캄보디아가 택한 ‘인간의 길’이었다.

 

하지만 잊음은 결코 완전한 치유가 아니다.
기억을 지운 자는, 언젠가 다시 기억에 쫓긴다.
캄보디아는 이후 수백 년 동안
끊임없이 새로운 신과 새로운 질서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아무리 바꿔도, 인간은 여전히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신을 바꾸었지만, 욕망을 바꾸지 않았다.

 

앙코르의 돌은 지금도 정글 속에서
조용히 부식되고 있다.
돌의 왕국은 사라졌지만,
그 돌을 세운 인간의 손길은 아직도 그 위에 남아 있다.
역사는 돌보다 오래가지 못하지만,
욕망은 언제나 다음 문명을 준비한다.
캄보디아의 돌 위에 자란 진흙,
그 진흙 속에서 인간은 다시 신을 꿈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