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식민의 시간: 신의 나라에서 식민지로
역사는 늘 누군가의 시선에서 다시 태어난다.
앙코르의 돌들이 수백 년 동안 정글 속에 잠들어 있던 그때,
그곳을 다시 ‘발견했다’고 외친 것은 캄보디아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프랑스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문명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다른 문명의 잔해를 ‘소유’하려 했다.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편입한 순간,
이 땅은 더 이상 신의 나라가 아니었다.
이제 그것은 ‘연구의 대상’, ‘보존의 가치’, ‘동양의 유적’이 되었다.
앙코르와트는 더 이상 믿음의 중심이 아니라,
유럽 학자들의 박물관 노트에 새겨진 ‘문명 샘플’이었다.
그들이 말한 ‘발견’은 사실상 ‘정복’의 다른 이름이었다.
식민지는 단지 영토가 아니라, 시간의 약탈이었다.
프랑스는 캄보디아의 현재를 지배했고,
그들의 과거를 재해석했으며,
그들의 미래를 설계했다.
즉, “이 나라의 역사는 당신들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언어로 쓰인다.”
이것이 식민주의의 가장 잔혹한 방식이었다.
총보다 무서운 것은 펜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는 캄보디아의 유적을 복원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정체성’을 파괴했다.
그들은 사원을 청소하고, 벽화를 복원하며,
이 문명의 위대함을 세계에 알렸지만,
그 과정에서 이 땅의 사람들은 침묵 속으로 밀려났다.
문명을 되살린 손이, 사람의 기억을 지웠다.
노로돔 왕조는 프랑스의 그림자 아래서 존재했다.
왕은 여전히 왕이었지만, 그 권위는 프랑스 총독의 서명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신의 이름으로 통치하던 왕은 이제 문서의 서명으로만 존재했다.
그것은 캄보디아가 처음으로 경험한 ‘보이지 않는 신’이었다.
이번에는 신이 프랑스어로 말했고, 법률로 통치했다.
식민의 시절, 캄보디아의 사람들은 ‘보존’이라는 단어의 잔혹함을 배웠다.
유럽은 앙코르의 돌을 보존했지만, 그 위의 인간은 방치했다.
그들은 사원의 돌에 금을 입히면서,
농부의 손에 묻은 진흙은 외면했다.
‘문화재’는 지켜졌지만,
‘문화’는 잃어버렸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적응한다.
왕실은 프랑스와 타협했고, 불교는 침묵 속에서 생존했다.
스님들은 더 이상 혁명을 말하지 않았고,
농민들은 외세의 언어 대신 기도를 택했다.
그 기도는 신에게 닿지 않았지만,
그래도 인간의 마음을 붙잡는 유일한 언어였다.
프랑스는 자신들이 문명을 구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구원은 늘 구원자의 착각에서 비롯된다.
문명을 구한 자는 종종 그 문명을 다시 노예로 만든다.
‘보호령’이라는 단어 속에는 보호와 지배가 공존했다.
캄보디아는 지켜진 것이 아니라, 길들여졌다.
하지만 모든 지배에는 역설이 있다.
프랑스의 통치는 동시에 ‘자각’을 낳았다.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이 시기 처음으로 등장했다.
문명을 잃은 자들이 자신을 다시 정의하려는 순간,
진짜 역사가 시작된다.
앙코르의 돌이 외세의 눈으로 다시 해석될 때,
그 돌을 세운 조상들의 목소리가 다시 깨어났다.
식민의 시간은 수치의 시대가 아니라,
정체성의 실험실이었다.
캄보디아는 그 실험 속에서 자신이
단순한 ‘앙코르의 후손’이 아니라
‘기억의 생존자’임을 배웠다.
역사는 승리자가 쓰지만,
기억은 언제나 생존자가 남긴다.
앙코르의 돌 위에 남은 새김은
이제 프랑스어가 아닌 크메르어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캄보디아는
신의 나라가 아니라 ‘사람의 나라’로 다시 태어날 준비를 했다.
5장. 독립과 이상, 그리고 거짓된 낙원
모든 독립은 새로운 종속의 시작이다.
1940년대 후반, 프랑스 제국의 그림자가 서서히 물러날 때
캄보디아는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자유를 얻는 순간,
그 자유를 어떻게 써야 할지를 잃는다.
노로돔 시하누크는 독립의 얼굴이었다.
그는 젊었고, 매력적이었으며, 무엇보다 ‘꿈꾸는 왕’이었다.
그는 신의 시대를 지나온 이 땅에
새로운 이상을 세우려 했다.
그 이상은 단순했다.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나라.”
그러나 역사는 늘 단순한 꿈을 잔혹하게 시험한다.
시하누크는 왕이면서 정치가였고,
정치가이면서 예술가였다.
그는 국제회의에서 노래를 부르고,
필름 카메라를 들고 영화를 찍었다.
그는 캄보디아를 세계의 무대 위로 끌어올렸지만,
그 무대 위의 조명은 냉전이라는 이름의 두 개의 태양이었다.
하나는 미국, 다른 하나는 소련이었다.
두 개의 태양 아래에서, 한 나라의 그림자는 늘 뒤틀린다.
시하누크는 중립을 택했다.
그는 동쪽도 서쪽도 아닌 길을 걷고자 했다.
그러나 중립은 단순한 위치가 아니라,
끝없는 줄타기였다.
그 줄 위에서 한 걸음만 잘못 디디면,
국가 전체가 낙하한다.
그의 중립은 이상이었지만,
이상은 언제나 현실보다 빠르게 무너진다.
미국은 그를 의심했고,
공산주의자들은 그를 이용했으며,
백성들은 그를 신처럼 숭배하면서도
속으로는 그의 세금과 검열에 불만을 품었다.
그는 평화를 말했지만,
그 평화는 늘 억압의 형태를 띠었다.
이상은 언제나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등장하지만,
그 뒤에는 통제의 손이 숨어 있다.
시하누크의 시대는
앙코르의 신이 돌아온 시대와 닮아 있었다.
왕은 다시 상징이 되었고,
그의 이름은 학교와 사원, 거리마다 새겨졌다.
그러나 신의 이름이 많을수록,
인간의 자유는 적어진다.
그는 신이 되려 했지만,
신이 되었다는 그 사실이
그를 인간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냉전의 바람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휩쓸 때,
캄보디아는 더 이상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
시하누크는 균형을 잡으려 했지만,
그가 외교의 무대에서 춤추는 동안
국내에서는 새로운 신념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것은 ‘평등’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신이었다.
폴 포트와 크메르루주,
그들은 시하누크가 세운 이상을
다른 방식으로 실현하려 했다.
더 순수하고,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인간은 언제나 이상을 다시 포장한다.
그것이 정치이든, 종교이든, 혁명이든.
그리고 그 포장 속에는 언제나 같은 본질이 있다 —
두려움.
불평등에 대한 두려움,
외세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상은 결국 그 두려움을 가리기 위한 언어였다.
시하누크의 캄보디아는
평화를 말하며 검열을 강화했고,
중립을 외치며 모든 편을 의심했다.
그는 신의 자리에 서 있었지만,
그 발밑에서는 이미 새로운 신이 태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혁명이라는 이름을 가진 신이었다.
이상은 결국 또 하나의 신이었다.
인간은 신을 버렸지만,
신의 구조는 버리지 못했다.
그들은 신의 자리를
이념과 지도자와 체제로 바꾸었을 뿐이었다.
시하누크는 자신이 만든 이상 속에서 포로가 되었다.
그가 세운 낙원은 점점 감시의 정원으로 변했고,
그 정원 안에서 사람들은
말보다 눈치를 먼저 배웠다.
그 낙원은 거짓된 평화의 모형이었다.
그리고 그 평화는 곧 피로 물들게 된다.
역사는 언제나 같은 순환을 그린다.
신의 시대가 끝나면,
이상의 시대가 찾아온다.
그러나 이상은 언제나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새로운 형태의 믿음일 뿐이다.
그리고 믿음은, 언제나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진다.
6장. 킬링필드: 인간이 신보다 잔혹해진 시대
신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공허였다.
그리고 인간은 그 공허를 견디지 못했다.
폴 포트는 그 공허를 메우기 위해 새로운 신을 만들었다.
그 신의 이름은 ‘순수’였다.
1975년, 크메르루주는 수도 프놈펜에 입성했다.
그들은 총을 들고 있었지만, 그 총의 방향은 외세가 아니라 자국민을 향했다.
“우리는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
그들의 혁명은 신을 부정했지만,
그 부정 속에는 또 다른 신앙의 구조가 있었다 —
절대적 믿음, 맹목적 복종, 그리고 희생의 의례.
폴 포트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 되고 싶었던 인간이었다.
그는 ‘평등’을 신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모든 사람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밥을 먹고, 같은 말을 해야 했다.
개인의 이름은 지워졌고,
출신과 기억은 죄가 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인간’을 만들겠다고 외쳤지만,
그들의 이상은 곧 인간을 지우는 기술이 되었다.
수도는 비워졌다.
아이들과 노인, 의사와 스승이
들판으로 끌려가 땅을 갈았다.
‘노동은 구원이다’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지만,
그 노동은 구원이 아니라 선별이었다.
살아남을 자와 죽을 자를 구분하는
비인간적 제의의 시작이었다.
이상은 언제나 피를 먹고 자란다.
폴 포트의 ‘순수한 사회’는
그 피 위에서만 유지될 수 있었다.
그는 ‘교육받은 자’를 가장 먼저 제거했다.
지식은 의심을 낳고,
의심은 신앙을 부패시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가장 똑똑한 자들이 가장 먼저 죽었다.
문명은 그날 스스로의 뇌를 잘라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는
단지 죽음의 장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인간의 믿음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증명한 실험실이었다.
신앙이든, 이념이든,
‘절대적 진리’를 믿는 순간
인간은 신보다 잔혹해진다.
왜냐하면 신은 용서할 수 있지만,
이상에 사로잡힌 인간은 결코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다.
폴 포트는 종교를 부정했지만,
그의 체제는 하나의 종교였다.
그에게는 교리와 의식, 제사와 죄가 있었다.
오직 ‘순수한 사회’라는 이상만이 구원이었고,
그 구원을 위해선 어떤 희생도 정당화되었다.
이것이 신 없는 종교의 가장 잔혹한 형태였다.
이상은 신보다 위험하다.
신은 적어도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만,
이상은 인간의 한계를 없애려 한다.
폴 포트는 인간을 완벽하게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완벽함이란 곧 다양성의 제거를 의미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낙원에는 웃음이 없었고,
아이들의 이름도 없었다.
역사는 그 시절을 ‘킬링필드’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땅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완벽을 향한 폭력’의 은유다.
우리는 신을 믿지 않아도 괜찮지만,
진리를 절대화한 순간
우리는 언제든 폴 포트가 될 수 있다.
1979년, 베트남군이 프놈펜에 들어왔을 때,
땅은 이미 피를 기억하고 있었다.
수백만 명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사원의 돌처럼 무거운 침묵만 남았다.
그 침묵은 지금도 남아 있다.
학교가 세워지고, 길이 놓여도
그 침묵은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땅의 기억이 아니라,
인간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문명은 다시 세워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복구되지 않는다.
킬링필드는 단지 과거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이 만들어낸 하나의 패턴이다.
신이 없을 때 인간은 신이 되려 하고,
신이 된 인간은 결국 인간을 파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