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고려 말의 풍경은 끝이 가까웠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는 노인의 얼굴과도 같았다. 산과 강은 그대로였지만, 사람들의 마음속 질서는 이미 무너져 있었고, 나라의 기둥이었던 토지는 이미 몇몇 자의 손에 집중돼 있었다. 농민은 밭에서 밀려났고, 관리는 절에 뇌물을 바치고, 사찰은 땅을 늘렸다. 그것은 나라가 아니라 거대한 사유재산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이성계는 그 틈을 정확히 읽었다. 명나라의 부름을 받은 출정길에서, 그는 칼을 거두었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그는 '충신'에서 '역적'이 되었고, 곧 ‘새로운 왕조의 개창자’가 되었다. 1392년, 고려가 내려앉고 조선이 세워졌다. 조선은 ‘이성계의 나라’로 기억되지만, 초반의 설계자는 정도전이었다. 그는 고려의 귀족 정치를 끝내고, 새로 태어나는 나라에 ‘신권 중심의 유교 국가’를 꿈꾸었다. 고려가 왕실과 불교의 나라였다면, 조선은 문신과 유교의 나라였다. 정도전은 국호를 ‘조선’으로 정했고,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그는 법전을 만들고, 종묘와 사직의 틀을 새로 세웠으며, 무엇보다 왕이 절대 권력을 갖지 못하도록 신하의 권한을 분산시켰다. 그는 이 나라의 미래를, 한 사람의 힘이 아니라 제도로
제1장 고려의 건국과 태조 왕건 고려는 단순히 하나의 왕조가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고, 다양한 세력들이 충돌하고 융합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신라의 기나긴 역사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새로운 시대가 필요했다. 고려는 그 혼란의 시대 속에서 등장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 사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왕건. 그는 단순한 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가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바란 개국 군주였다. 그의 꿈은 단순한 정복이 아니었다. 그는 혼란을 하나로 모으고, 부서진 것들을 다시 잇는 사람이었다. 고려 건국의 배경 후삼국 시대와 고려의 등장 10세기 초, 한반도는 다시 세 개의 나라로 나뉘어 있었다. 오랫동안 존속해 온 신라는 더 이상 예전의 신라가 아니었다. 왕권은 약해졌고, 귀족들의 권력이 강해졌다. 백성들은 신라를 버렸고, 새로운 나라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 틈을 타서 등장한 것이 후고구려(태봉)와 후백제였다. 후백제는 견훤이 세웠다. 그는 신라의 장군이었으나, 신라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신라를 배신했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 후백제는 한반도의 서남부를 차지하며 강한 군사력
제1장 삼국의 탄생과 초기 국가 형성 세상은 언제나 변해왔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사람들이 땅을 나누고, 강을 사이에 두고,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려 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한반도도 그랬다. 먼 옛날, 이 땅에도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흩어졌다가 다시 모였다. 그렇게 하나의 무리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더 커지면서 국가가 되었다. 처음부터 강한 나라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반도에는 수많은 작은 집단들이 있었고, 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누군가는 더 많은 땅을 가지게 되었고, 누군가는 더 많은 사람들을 거느렸다. 힘이 있는 자들이 생겨났고, 그들 중 일부는 왕이 되었다. 그렇게 삼국이 등장했다. 고조선 이후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 고조선은 오래전부터 이 땅을 지배하던 나라였다. 단군의 후손들이 다스렸고, 넓은 강과 평야를 가졌다. 그러나 고조선의 운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108년, 중국의 한(漢)나라가 공격해 왔고, 고조선은 무너졌다. 그러나 나라가 사라졌다고 해서 사람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고조선의 옛 땅에는 여전히 많은 부족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했다. 한나라는 고조선의
나라는 한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시간이 쌓여 나라를 이루고, 그 속에서 지도자는 방향을 정한다. 어떤 지도자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나라를 다시 세웠고, 어떤 지도자는 경제를 성장시키며 국민의 삶을 바꾸었다. 어떤 이는 민주주의를 외쳤고, 또 어떤 이는 산업화를 이끌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시대에 태어났고, 서로 다른 환경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바라본 곳은 하나였다. 대한민국. 이 나라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이 나라를 어떻게 남길 것인가. 이승만 – 대한민국의 기틀을 세운 초대 대통령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고, 헌법 제정 및 국가 체제를 확립했다. 6·25 전쟁 중 UN군을 요청하여 국가를 지켰으며, 이후 한미 상호방위조약(1953)을 체결하여 안보 기반을 마련했다. 반면에 1952년 발췌개헌(직선제 개헌) 강행, 1954년 사사오입 개헌(초대 대통령 연임 제한 철폐) 등으로 장기 집권을 시도했다. 1960년 부정선거(3·15 부정선거)로 국민의 거센 저항을 받았으며, 결국 4·19 혁명으로 하야하며 실각했다. 박정희 – 경제개발의 시대를 열다 1961년, 그는 군사정변
왕의 자리는 높았으나, 세상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가 왕이 된 것은 단순한 운명이 아니었다. 조선은 이미 낡아 있었다. 바람이 불고,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서양의 배가 바다를 가르고, 일본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중국은 더 이상 조선을 지켜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혼란 속에서, 어린 소년이 왕위에 올랐다. 1863년, 그는 조선의 26대 왕이 되었다. 그러나 어린 왕은 아직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흥선대원군의 섭정, 개혁과 쇄국 고종이 왕이 되었을 때, 실질적으로 정치를 움직인 사람은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었다. 대원군은 강한 사람이었다. 오랜 세월을 기다렸고, 기회가 오자마자 움직였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세도정치의 타파였다. 안동 김씨를 비롯한 외척 세력의 권력을 제거했다. 왕권을 강화하고, 신하들이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게 했다.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아, 백성들의 고통을 줄이려 했다. 그러나 단순히 내부 개혁만으로는 조선을 살릴 수 없었다. 바깥의 세상도 변하고 있었다. 서양의 배들이 조선의 해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원군은 그것을 거부했다. 쇄국정책(鎖國政策)
한 사람의 인생은 부모의 선택에서 시작되지만, 왕의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특별한 존재였다. 그의 이름은 조선의 미래를 걸머질 사람이었고, 그가 걷는 길은 조선의 운명을 결정짓는 길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왕자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사도세자였고, 그의 할아버지는 영조였다. 사도세자는 왕이 되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쳤다. 영조는 훌륭한 왕이었지만, 아버지로서는 잔혹했다. 그리고 이제, 그 두 사람의 운명이 얽힌 이 아이는 조선의 왕이 되어야 했다. 정조는 그 모든 무게를 짊어진 채, 조선의 왕이 되었다. 개혁을 꿈꾸다 1776년, 그는 왕위에 올랐다. 조선은 이미 오래된 나라였고, 곳곳이 낡고 닳아 있었다. 왕이 바뀌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을 움직이는 것은 여전히 신하들이었고, 그들은 왕을 시험했다. 그러나 정조는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조선의 틀을 바꾸고 싶었다. 그러나 한꺼번에 모든 것을 바꾸려 하면 반발이 클 것이었다. 그는 신중하게 움직였다. 그의 개혁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진행되었다. 규장각, 학문으로 나라를 바로 세우다 그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그는 평범한 왕이 아니었다. 왕실의 핏줄을 타고났지만, 어머니는 신분이 낮은 무수리였다. 형들은 정통성을 가졌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는 예상대로 흐르지 않았다. 아버지 숙종은 그를 멀리했으나, 형 경종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면서 그에게 길이 열렸다. 1724년, 그는 조선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왕이 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이미 기울고 있었다. 붕당이 나뉘어 서로 싸웠고, 백성들은 굶주렸으며, 왕조의 질서는 흐트러져 있었다. 왕은 스스로를 다스려야 했고, 신하들을 다스려야 했으며, 결국 나라를 다스려야 했다. 영조는 긴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선을 다듬는 일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탕평책, 싸움을 멈추게 하다 조선은 붕당의 나라였다.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이 나뉘어 서로를 견제했고, 왕권은 그들의 싸움에 휘둘렸다. 영조가 왕이 되었을 때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는 고민했다. 누군가 한쪽을 완전히 제거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들을 화합시켜야 하는가.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탕평책(蕩平策). 왕권을 강화하면서도, 당파 간의 균형을 맞추는 정책이었다. 노론과 소론을 균형 있게 등용했다. 당파 간 다툼을 줄이기 위해 탕
그는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 그러나 왕이 되어야만 했다. 조선의 왕좌는 피로 얼룩져 있었다. 왕이 된다는 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광해군이 있었고, 그를 몰아낸 서인 세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새로운 왕이 필요했다. 1623년, 반정이 일어났다. 광해군은 폐위되었고, 새로운 왕이 세워졌다. 그의 이름은 능양군, 훗날의 인조였다. 그러나 왕이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을 가진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는 조선을 다스려야 했고, 무엇보다 조선의 자존심을 지켜야 했다. 그러나 그가 걸어야 했던 길은 생각보다 험난했다. 반정으로 세운 왕, 그러나 불안한 왕좌 인조는 스스로 왕이 된 것이 아니었다. 서인들이 만든 왕이었다. 광해군은 실리 외교를 펼쳤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균형을 잡았다. 그러나 서인들은 그것을 반역이라 보았다. 그들에게 조선은 명나라의 신하였고, 후금은 적이었다. 1623년, 서인들은 반정을 일으켰다. 광해군은 쫓겨났다. 그리고 인조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문제는 왕좌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왕좌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는 명나라를 섬겨야 했다. 그것이 서인의 뜻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운명은 그 뜻대로만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원하지 않은 왕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는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 형이 있었다. 적자가 있었다. 그는 그저 한 명의 왕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이상하게 흐르기 마련이었다. 그의 형이 죽었고, 그는 남았다. 그리고 그는 왕이 되었다. 조선의 역사에서 왕이 된다는 것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었다. 왕이 되는 순간부터 그는 싸워야 했다. 정치와 신하들과,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과 싸워야 했다. 광해군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나 끝내 그는 왕이었으나, 왕이 아니었다. 전란 속에서 왕이 되다 그의 삶은 전쟁과 함께 시작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고, 조선은 불타올랐다. 왕이었던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쳤다. 왕이 없는 조선, 백성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때, 광해군은 움직였다. 그는 어린 왕자였으나, 백성들을 버리지 않았다. 피난을 떠난 선조를 대신해 전쟁을 수습해야 했다. 그는 명나라와의 외교를 이끌었고, 의병장들을 격려했다. 한양이 무너졌으나, 조선은 끝나지 않았다. 광해군은 조선을 지켜야 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도 그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던 그가, 이제 왕이 되
나라를 세운 자가 있었다. 그리고 나라를 키운 자가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다듬는 일은 그 어느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은 태조의 손에서 태어났고, 세종의 손에서 빛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직 정비되지 않은 제도가 많았고, 나라의 법은 명확하지 않았다. 왕이 혼자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었다. 신하들과 조정이 움직여야 했고, 나라를 다스리는 틀을 만들어야 했다. 그 일을 한 사람이 성종이었다. 왕이 되다 그는 왕이 될 준비를 하지 못한 채 왕이 되었다. 1469년, 조선의 왕이었던 예종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젊은 왕이었고, 병이 깊었다.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예종의 어머니, 정희왕후는 결정을 내렸다. 예종의 조카이자, 세조의 손자였던 자을산군이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가 바로 성종이었다. 나이는 열여섯. 너무 어린 나이였다. 나라를 다스릴 경험도 없었고, 정치의 흐름을 읽을 줄도 몰랐다. 하지만 그에겐 신하들이 있었다. 조선의 기틀을 다지는 일은 혼자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신하들에게 귀를 기울였다. 성종의 조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유교의 나라, 조선을 완성하다 성종은 조선을 다듬었다. 법을 정리하고, 제도를 정비했다. 세